’청소년 인생학교’ 청소년들은 스스로 기획한 활동에 참여하며 원하는 것을 계획해 실행에 옮겨보는 경험을 한다. 그 안에는 여행도 포함된다. 열일곱인생학교-고양 제공
우리나라 부모들 ‘조기교육' 참 좋아합니다
반대로 ‘인생교육'은 미루고 또 미루죠
“내가 누구인지, 뭘 좋아하는지 모르겠어요”
서른살 자녀가 이 소리 하면 뒷바라지하실 건가요?
하고 싶은 것, 궁금한 것 많은 반짝반짝 열일곱
‘조기 인생교육’이 부모 노후준비 될 수도 있답니다
“놀 때 아니다. 지금 공부해야 나중에 후회 안 해.”
우리나라 부모라면 아이한테 한번쯤 해봤을 잔소리. 대학입시가 중요한 우리나라에서 중·고 6년의 세월은 ‘입시 레이스’로 불린다. ‘저 녀석도 학원 뺑뺑이 도느라 힘든가 보네. 그런데 어떻게 해. 그게 현실인걸….’ 한데 이렇게 앞만 보고 쉼 없이 달리는 분위기 속에서도 잠시 멈춰 숨 고르고 내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살피고 가는 아이들도 있다.
대학 향해 달리는 입시 레이스서 나와1년간 쉬었다 가는 열일곱 아이들
‘인생학교' 콘셉트로 학교도 등장 또래 친구 만나며 하고픈 일 기획 ‘공부' 뒤로 미뤄진 관계 극복법 등 배워 밥짓기 등 일상의 자립 등도 경험하며 ‘다음엔 뭐 할까’ 스스로 차분하게 고민
■ 1년, 느릿느릿 걸어보는 건 어때?
대학생 황은율씨는 2011년 중학교 2학년이었다. 엄마 이수진씨와 아빠 황병구씨는 우연히 아일랜드 ‘전환학년제’ 이야기를 접하고는 큰딸에게도 이런 기회를 주고 싶었다. 청소년들에게 1년간 시간을 주고 자신의 꿈을 찾아보게 하는 제도. 1년 정도 충분히 고민했다. 딸은 2012년 고교 진학을 미루고 1년을 쉬었다. 진로 찾기를 생각하고 시작했지만 사실상 안식년 보내듯 푹 쉬고 놀았다. 도서관 가기, 드라마 보기, 강아지 기르기, 집안 살림 돕기, 아빠 출장길 따라가 여행하기…. 딸은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면서 조금씩 성장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도움받아야 할 것들을 구분할 줄 알게 됐다. 자기 마음을 잘 들여다보는 눈도 생겼다. 여유 시간이 생기며 가족끼리 진심 어린 대화를 충분히 나눌 수도 있었다.
1년 푹 쉬었다 해서 무슨 문제가 일어나진 않았다. 쉰 다음 고교에 진학해 한 살 어린 후배들과 공부하면서는 가끔 동생들의 고민을 들어주는 언니 역할도 하며 문제없이 지냈다.
부부는 딸의 경험에 비춰 입시경쟁에 찌들어 앞만 보며 달리는 청소년들에게 느릿느릿 걸어보는 시간도 의미가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숨쉬는 방학 꽃다운 친구들’(이하 꽃친)이라는 가족동행 프로그램을 시작하게 된 계기다.
꽃친은 중학교 졸업 뒤 진학을 미루고 1년짜리 방학을 선택한 청소년과 그 가족들의 모임이다. 청소년들은 일주일에 두 번 친구 그리고 그들의 가족과 만나 연대하고, 학교에서 못 해본 다양한 배움 활동을 한다. 1기로는 서울을 비롯해 파주, 오산 등 다양한 지역에서 열한 가족이 모였다.
’열일곱인생학교-고양’에서 활동하는 청소년들이 각자 자유롭게 하고 싶은 활동들을 하고 있다. 열일곱인생학교-고양 제공
모임은 가족 모두 동의해야 참여할 수 있다. 중등교육 6년간 부모는 아이를 사교육에 위탁하거나 아이 학습에 지나치게 과잉개입해서 문제가 되는데 가족 전체가 한마음으로 아이가 보낼 1년의 긴 방학을 함께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 이씨는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지역적으로 떨어져 살지만 아이를 통해 만나게 된 가족들이 연대해 서로의 아이들을 돌보고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을’을 만들어보자는 뜻에서 가족 참여를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정신실씨의 딸 김채윤양은 꽃친 1기다. 예술중에서 피아노를 전공했고, 꿈꾸던 예술고에도 합격했지만 많은 고민 끝에 잠시 쉬었다 가는 길을 택했다. 친구를 더이상 친구가 아닌 경쟁자로 삼으며 앞만 보며 달려가야 하는 상황 속에 들어가기 싫었다. 지금은 “그때 이 선택을 안 했으면 어쩔 뻔했냐”며 웃는다. 정씨는 “아이가 꽃친에서 사람들과의 관계 갈등을 성숙하게, 차분하게 풀어보는 경험을 할 수 있어서 정말 좋다”고 했다. “지금 교육 시스템 안에서는 또래 갈등이 생겨도 그냥 지나가기 쉬워요. 공부가 우선순위니까요. 갈등을 푸는 건 뒤로 미뤄지죠. 아이가 ‘사람 사이에선 갈등이 생기는 게 자연스러운 걸 알았고, 내 마음과 다른 사람 마음을 들여다보는 여유도 생겼다. 이젠 친구들이 경쟁자가 아닌 정말 친구로 보인다’고 말하더군요. 대학에 대한 생각도 바뀌었어요. ’반드시 지금 가야 할 곳’이 아니라 ’내가 필요하다 느낄 때 선택할 수 있는 곳’으로요. 남들과 다른 선택을 하는 데 대한 용기가 생겼죠.”
■ 꽃친·열일곱인생·꿈틀리 등 인생학교 등장
올해는 꽃친처럼 열일곱 나이대 청소년에게 1년여 동안 쉼을 주고, 놀면서 다양한 배움을 접할 기회를 열어두는 ‘청소년 인생학교’들이 개교했다. 교육 선진국인 덴마크에서 초등교육과정(1학년~10학년으로 우리나라의 초등 6년~고교 1년에 해당)을 마치기 전 아이들에게 ‘에프테르스콜레’(영어로는 애프터스쿨)라는 이름의 인생학교를 경험하게 하는 것과 비슷하다. 덴마크 에프테르스콜레가 학생의 관심사와 관련된 특정 분야를 심화해 배울 수 있는 등 ’진로탐색’에 방점을 찍고 있다면, 한국형 에프테르스콜레는 앞만 보고 달리기를 강요받는 아이들에게 나와 내 주변의 관계를 들여다볼 여유, 스스로 자립해 삶을 설계해볼 시간 등을 주자는 의미가 크다.
경기도 고양시에 사는 심소연양도 고교 1년 진학을 미루고 ’열일곱인생학교-고양’에 다니고 있다. 심양은 ”청소년이면 뭔가 꿈꿔야 한다고 하고, 그 꿈을 위해 노력하라고 한다. 근데 그게 대체 뭔지 모르겠는 상황에서 ‘공부’만 해야 한다고 하니 혼란스러웠다”고 했다. “우리 1년 정도 쉬었다 가면 어떨까?” ‘쉼’을 먼저 제안한 건 엄마 한은정씨였다.
이 학교는 교육시민단체 아름다운배움이 운영하는 청소년 인생학교. 총괄교사인 이자연씨는 공교육 교사였다. 교육 현장에서 내가 누구인지, 꿈은 뭔지 생각할 겨를 없이 수능 점수에 맞춘 인생을 사는 걸 보며 안타까웠다. 교육운동 차원에서 지금 학교에 참여하고 있다. “덴마크와 달리 한국식 인생학교에는 ‘회복 과정’이 필요해요. 경쟁식 공부에서 받은 스트레스, 부모의 인정을 받지 못해 낮아진 자존감 등을 해결해야 아이들이 점수로서의 자신이 아닌 정말 자기 자신으로 자존감을 찾죠. 그래야 자기 자신도 제대로 보이고, 꿈도 보이고, 공부도 즐거워집니다.”
올해 이 학교 1기로 참여한 아이는 모두 10명. 아이들과 학부모들은 이 학교에 와서 가장 좋은 점으로 이 교사의 상담을 손꼽는다. “공교육은 시스템상 아이들 숫자가 많기 때문에 한 선생님이 모든 아이를 일일이 다 살필 수 없잖아요. 공부를 특별히 잘하거나 문제를 심하게 일으키는 아이가 아니라면 상담은 한 번 정도 하고 넘어가죠. 게다가 공부가 중심이 되니 아이들 마음속에 어떤 움직임이 있는지 살필 겨를이 없어요. 이 학교에 오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열일곱살 성장통을 겪는 제 생각과 고민을 정말 긴 시간 동안 성심성의껏 깊게 들여다봐 주고 길찾기를 도와주는 선생님이 있기 때문이었어요.” 심양의 이야기다.
청소년 인생학교 중에는 기숙형, 통학형 학교도 있지만 1년 동안 스스로 방학을 선택한 청소년과 그들의 가족이 일주일에 두 번 모임을 갖는 식의 공동체도 있다. 사진은 '꽃다운친구들' 청소년들의 모습. 꽃다운친구들 제공
10명이 모인 이 학교에서도 자연스럽게 또래 갈등이 불거질 때가 많았다. 학교는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심양은 ”공동체 안에서 트러블도 생길 수 있는데 그럴 때 감정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터놓고 말해요’ 시간을 통해 내 마음, 타인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한다”며 ”다른 친구 마음도 봤지만 사실 내가 대체 어떤 아이인지 나를 잘 보게 된 것 같다”고 했다.
엄마 한씨는 ”학교를 통해 아이들이 삶의 지혜를 터득하고, 자립의 경험을 해본다는 점도 좋았다”고 했다. ”우리나라 아이들은 학년이 올라갈수록 인지적인 공부만 하잖아요. 살아가는 법을 배우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만들어지죠. 이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직접 장 봐서 점심을 차립니다. 어느 날 딸애가 ’쌀벌레가 생겨서 모두 모여 다 골라냈어’라고 말하는데 기특하더라고요.”
학생들은 '꿈 협동조합'이라는 이름의 ’친구 진로탐색 돕기’ 활동도 한다. 교사를 꿈꾸는 친구가 있으면 실제 이 직업에 대해 심층적으로 조사해 이를 친구에게 설명해준다. 특별히 관심 없었던 다른 직업 세계를 엿보는 시간이다.
■ “다음 진로는 제가 직접 찾아볼게요”
열일곱인생학교라는 이름으로 용인 지역에도 학교가 있다. 함께여는교육연구소가 운영하는 ’열일곱인생학교-용인’은 ‘마을 캠퍼스형 학교’라 할 수 있다. 이 학교에 다니는 청소년들은 동네 서점인 ’우주소년’, 밥상 공동체인 ’파지사유’, 문화공간인 ’느티나무도서관’ 등 동네 주변 공간들을 배움터로 삼아 책읽기, 토론, 밥먹기, 프로젝트 진행, 목공 등 하고 싶은 것들을 해본다. 함께여는교육연구소 우경윤 소장은 “’네 마음대로 살아봐도 괜찮아’라고 말해주는 학교다. 동네 인적자원과 공간이 멘토가 되어 아이들이 원하는 다양한 활동을 해보도록 지원한다“고 설명했다. 1기 정채송양은 “일반 학교에서는 또래 친구와 교사를 보는 게 전부였는데, 우리 지역에 있는 다양한 공간에서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이웃’이 생긴 느낌이 들었고, 이 마을 공동체에서 나도 하나의 구성원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했다.
지난 2월 개교한 인천광역시 강화군 소재 꿈틀리인생학교는 기숙형 청소년 인생학교다. ‘옆을 볼 자유’라는 슬로건을 달고 청소년 스스로 삶을 설계하고, 그 과정을 즐길 수 있게 돕고자 문을 열었다. 전교생이 농사 체험도 한다. 1기는 총 30명.
청소년 인생학교의 공통점은 특별히 규격화된 교육과정이 없다는 것. 청소년들은 1년간 뭘 할 것인지 스스로 주제를 세워 활동을 계획한다. 입시를 위한 국·영·수 수업도 없다. 아이가 관련 공부가 필요하다 판단하면 학습상담 등을 해주는 정도로 도움을 준다. 이런저런 하고 싶은 것들을 시도해보다가 스스로 “난 이제 수학 공부가 필요한 것 같다”고 말하는 아이들도 있다.
올해 닻을 올린 각 학교 1기 청소년들이 인생학교를 나와 선택하게 될 길도 ’공교육으로의 편입’, ’대안학교’, ’홈스쿨’ 등 다양하다. 인생학교 쪽에서는 “부모들은 ’1년 꿇으면 애가 나쁜 길로 들어서는 거 아닌가’ 걱정만 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1년의 쉼을 통해 자기주도성이 생겨서인지 스스로 다음 길을 알아보는 시도를 적극적으로 하는 경향도 생긴다”고 입을 모았다. 가령, 인턴십을 해보고 특성화고의 특정 학과가 내 길이 아니라고 판단해 일반고를 알아본다거나, 일반고 진학을 생각했다가 자기만의 특화된 진로 분야를 찾아 특성화고 진학을 준비하기도 하는 식이다.
’열일곱인생학교-용인’ 1기 정채송양은 “지난 1년을 돌아보니 ’빈둥대며 참 잘 놀았다는 말이 나온다”고 했다. “바로 고교 가기엔 두렵고 ’난 아직 준비가 덜 됐다’고 생각하는 친구들에게 쉬면서 인생학교 경험을 해보라고 하고 싶어요. 저는 이 경험 덕에 ’학교 가면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매력적인 점도 많아요. 학교 밖에서 한 번, 학교 안에서 한 번 17살로 다른 두 세상을 살아볼 수 있잖아요. 각각의 상황에서 미처 못 봤던 것들도 볼 수 있죠.”
김청연 <함께하는 교육> 기자
carax3@hanedu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