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연극배우협회가 제작한 창작연극 ‘친구야 미안해’의 한 장면. 이 협회는 학교폭력 문제를 다룬 이 연극을 일선 학교를 찾아다니며 무대에 올리고 있다. 뉴시스
지난 5월, 학교 수련회에 간 서울 ㄷ고 1학년 ㅎ(16)군은 친구 둘과 담배를 피우다 교사 눈에 띄었다. ㅎ군과 또 한 학생은 벌점이 깎일 것을 염려해 생활지도부에서 진술서를 쓸 때 ‘길에서 주운 담배’라고 말하기로 입을 맞췄다.
하지만 다음날 늦게 등교한 친구 ㅇ(16)군은 다른 두 친구들이 입을 맞춘 사실을 모른 채 ‘자신이 준 담배를 셋이 피웠다’고 진술했다. 이를 알게 된 ㅎ군은 ㅇ군을 찾아가 뺨과 배를 수차례 때렸다. 담배의 출처에 대한 재조사가 이어지고 ㅇ군이 자신의 생각대로 진술하지 않자 얼마 뒤 다시 ㅇ군을 화장실로 불러내 얼굴과 배를 때렸다. 학교는 지난 6월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학폭위)를 열어 ㅎ군에게 ‘전학’ 처분을 내렸다.
ㅎ군의 부모는 학폭위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학폭위 절차를 진행하는 과정에 특히 인권침해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생활지도부 교사 대신 학교 배움터지킴이(학생 생활 지도를 위한 별도의 자원봉사자)가 ㅎ군에게 진술서를 쓰게 했고, 교무실이 아닌 경비실에서 학부모에게 금연각서를 쓰게 했다는 것이다. ㅎ군이 배움터지킴이로부터 폭언을 들었으며 학폭위 위원들로부터는 “너는 양아치”라는 욕설을 들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학교 쪽은 “배움터지킴이는 교사의 보조 역할 수행하였을 뿐으로 항상 사안담당교사가 주관하였고, 경비실에서 금연각서를 쓴 것은 일과 시간 이전에 방문한 바쁜 학부모를 배려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ㅎ군의 아버지 ㅎ(55)씨는 “친구를 때린 자식의 행동은 백번 사과하나 전학은 과한 처분이다. 처분이 생활기록부에 기재되는데, 학생의 미래를 생각해 선처해달라”며 교육청에 재심을 청구했다. 하지만 교육청은 “보복의 목적으로 2회에 걸쳐 피해학생을 폭행한 행위는 비난 가능성이 매우 높고 피해학생 쪽에서 전학을 요구해 피해학생 보호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재심을 기각했다.
ㅎ씨는 학교폭력 처리 과정에서 학교 쪽의 처리 절차도 문제 삼았다. 학교장의 직무유기, 생활지도부 교사 등의 폭언 등을 이유로 서울시교육청에 지난 7월 이 학교에 대한 감사를 청구했다. 동시에 학교가 ㅎ군의 인권을 침해했다며 ‘학생인권 구제신청’도 했다. 시교육청의 학생인권 구제신청 결과를 보면, “(처리 과정에) 화해를 위한 조치와 화해 정도 및 반성, 선도 가능성이 고려되지 않은 미흡점이 있다고 본다”며 “가해학생에게 개전의 기회가 보장돼야 한다”고 판단했다. 23일 시교육청의 감사 결과에서도 “배움터지킴이가 업무에서 벗어나 학교폭력 사안조사 등을 수행했고 이에 대한 학교장의 지도 감독이 소홀했다. 학교장에 대해 시정을 요구하고 관련 교사들에 대해 신분상 조처를 했다”며 학교 쪽의 과실을 일부 인정했다.
ㄷ고 쪽은 교육청의 조처에 강하게 반발하며 ㅎ씨의 주장에 반박했다. ㄷ고는 “생활지도교사는 담배의 출처에 대한 두 학생의 진술이 엇갈린 이유를 파악하기 위해 해당 학생들을 조사했던 것이다. 학교는 적법한 절차에 따라 학생을 지도했고 학생의 인권을 침해한 사실이 없다. 가해학생은 이전에도 학교 폭력 사건을 일으켰고 이번에도 피해학생에 거듭 폭력과 협박을 행사해 전학 처분이 불가피하다. 피해자의 인권침해 때문에서라도 시교육청의 감사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으며 재심의청구를 신청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사안은 여전히 행정심판에서 분쟁 중이다.
■ 갈등이 모두 ‘사건화’ 되는 학교폭력법
현행 학교폭력예방법은 ‘학교 내외에서 학생을 대상으로 발생한 각종 신체·정신, 재산상 피해 전반’을 학교폭력으로 규정하고 있다. 피해자 보호를 위해 학교폭력의 개념을 상당히 넓게 설정하고 있는데, 여기에 “피해학생(또는 보호자)이 요청하는 경우, 학교폭력을 신고받거나 보고받은 경우 반드시 학폭위를 소집해야 한다”는 의무 조항이 겹치면서 학교 현장에서는 사소한 다툼도 사건화하게 되는 부작용이 발생한다. 올해 서울의 한 중학교에서는 학생 둘 사이에 오간 가벼운 욕설 한마디에 학폭위가 열리고 가해학생 ‘서면 사과’ 처분까지 났다. 학생들끼리는 이미 화해하고 평상시처럼 지내는데 피해학생 학부모가 ‘학교폭력’이라고 주장하면서 학교가 반드시 학폭위를 열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전수민 서울시교육청 학교폭력 전담 변호사는 “현재 학폭위에서 다루는 사안들은 평범한 학생들이 학교라는 작은 공동체에서 겪는 크고 작은 문제들이 대부분”이라며 “현행 학교폭력예방법은 학교가 학교폭력을 은폐하고 축소하는 경향이 있다고 전제한 뒤 만들어져 사소한 문제까지 모두 학폭위를 열고 생활기록부에 기재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런 법적 절차를 거치는 동안 갈등이 심화되는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부작용을 해결하기 위해 교육부는 따로 지침을 마련해 학폭위를 열지 않고 교사가 자체 종결할 수 있는 사안(담임종결)을 일부 정했지만, 이렇게 할 수 있는 사안은 오인신고 등 극히 일부로 국한하고 있다.
탁경국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교육위원은 “학교폭력은 범죄에 해당하는 심각한 ‘일진형’이 있고 경미한 다툼 수준의 ‘비일진형’이 있는데, ‘일진형’ 학교폭력은 이미 소년법과 형법 등으로 규율하고 있어 학교폭력예방법이 다루는 사건들은 대부분 ‘비일진형’ 경미한 사안”이라고 말했다.
■ “생기부에 쓰는데 화해는 왜 해”
현행 학교폭력예방법은 학폭위로부터 가해학생으로 결정될 경우, 반드시 퇴학부터 서면 사과까지 9가지 가운데 하나 이상의 처분을 내려야 한다. 또 교육부 지침은 이 처분 결과를 학교생활기록부(생기부)에 기재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가해학생으로 지목되면 필사적으로 가해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애쓴다. 또 가해학생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반성을 하기보다 “생기부에 쓰는데 화해는 해서 뭐해요”라고 응수하게 된다. 학폭위 참여 경험이 있는 전 학교전담경찰관 이아무개 경위는 “학폭위 들어가면 난리도 아니다. 성폭력 피해 여학생에게 가해학생 부모들이 ‘평소 행실’을 비난하며 가해 행동을 정당화하고 결사적으로 생기부에 기재되지 않도록 사력을 다한다”고 전했다.
가해학생 쪽은 최대한 시간을 끌어 생기부 기재 확정 시기를 미루기 위해 각종 수단을 최대한 동원한다. 기재가 미뤄지는 사이 자녀가 상급 학교에 진학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피해학생에 대한 사과, 관계 회복은 안중에 없다. 교육부 집계를 보면, 가해학생 쪽이 학폭위 결정에 불복해 교육청 징계조정위원회에 재심을 청구하는 건수는 2012년 305건에서 2015년 408건으로 해마다 늘고 있다. 일단 재심을 청구하면 재심 결정이 나오기 전까지는 생기부 기재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행정소송을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전문가들은 소년법과의 형평성도 지적한다. 헌법재판소는 지난 4월 학교폭력 가해학생의 처분을 생기부에 기재하는 것은 합헌이라고 결정했다. 하지만 소년법 32조는 “소년의 보호처분은 그 소년의 장래 신상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아니한다”고 규정해, 소년법 처분 결과는 생기부에 기록되지 않는다.
■ 진정한 사과 실종…피해자도 불만
현행 학폭법은 가해학생에게 엄격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피해학생 쪽도 불만족스럽긴 마찬가지다. 중2 딸을 둔 서울 관악구 직장인 ㅂ(47)씨는 올해 초 딸과 대화하다 깜짝 놀랐다. 딸 ㅂ(14)양이 “친구들이 나와 같이 놀지 않는다. 차라리 자살하고 싶다”고 아버지에게 털어놓은 것이다. ㅂ씨가 사정을 들어보니, 딸의 반 친구들은 딸과 급식도 함께 먹으려 하지 않는 등 따돌림을 시켰다. 처음에는 대여섯명이, 나중에는 반 전체가 가담했다. 다른 학년까지 소문이 퍼져 딸이 지나가면 3학년 학생들이 “쟤 ‘왕따’래”라고 수군댔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담임교사는 ㅂ씨에게 상황을 알리고 학폭위 개최 의사를 물었다. 하지만 ㅂ씨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ㅂ씨는 “학폭위가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아이들 관계가 완전히 파탄나고 갈등이 커진다”며 “학폭위는 학부모들이 각자 변호사 대동해 파워게임 하는 곳 아니냐. 피해자인 우리 아이 보호가 안 된다”고 교사에게 답했다.
학폭법이 가해자 징계에 중점을 둘 뿐 당사자 간 관계 회복과는 거리가 멀다 보니 궁극적으로 피해자 보호가 어려운 것이다. 피해학생 쪽은 ‘가해학생으로부터 사과 한마디 들은 적 없다’, ‘아무도 책임져주는 사람이 없다’는 무기력함을 호소한다. 서울 관악구 송아무개(46)씨는 지난 9월 초5 아들(11)이 친구들과 놀다 학교폭력 피해를 입었다. 아들을 괴롭힌 친구들은 학내 봉사 처분을 받았다. 하지만 달라진 것이 없다고 말한다. 송씨는 “가해학생들이 학교 봉사 5시간, 특별교육을 2시간 받았는데 잘못을 뉘우쳤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우리 애만 위축돼 학교에 다닌다. 학교가 제대로 가해학생들을 교육해줬으면 좋겠다”고 토로했다. 피해학생이 학폭위 결정에 불만족해 시·도지역위원회에 제기한 재심청구도 2012년 267건에서 2015년 571건으로 매년 늘고 있다.
■ ‘교육적 해결’ 모색해야
교육계에서는 현행 학폭법의 한계를 점검하고 교육적 해결이 가능하도록 법을 개정하자는 움직임들이 일고 있다. 교원단체 좋은교사운동은 피해학생과 가해학생 간에 관계 회복을 했다는 사실이 인정되는 경우에는 학교장이 당사자 및 그 보호자의 동의를 얻어 해당 사안을 종결하고, 생기부에 기재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하자고 제안한다. 또 현행 학폭법의 ‘분쟁조정' 조항에는 손해배상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루는데, 법률적 손해배상 외에도 당사자들 간의 관계 회복을 위한 기간을 정하고, 교우관계 회복을 위한 학교의 조처 등를 명시하게 하자고 제안한다.
지난달 31일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 조사국 아동청소년인권팀은 ‘학교폭력 처리 과정에서의 분쟁 완화방안 모색을 위한 토론회’를 열어 지난 6년간 인권위에 접수된 학교폭력 진정 사례들을 점검했다. 박광우 인권위 아동청소년인권팀장은 “사소한 다툼도 학폭법에 따른 처리 과정에서 극단적 갈등이 되는 등 분쟁이 커지는 측면이 있다. 인권위 차원에서 추후 개선 방안에 의견을 내고자 한다”고 말했다.
지난 7월에는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도종환 의원 등이 ‘회복적 과정이 가능한 학폭법 개정 토론회’를 열었지만 개정안 발의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도종환 의원실 관계자는 “가해자, 피해자, 학부모, 교사 등 각자 이해관계가 엇갈리다 보니 법 개정안이 적절한 균형추를 잡기 어려워 하나의 안을 내놓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김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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