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7일 서울 안평초등학교 체육관에서 열린 ‘2017.3.1.자 공모교장 심사 학교경영계획 설명회’에서 공모 교장 지원자가 공약을 발표하고 있다.
지난달 27일 오후 1시 서울 안평초등학교 정문 앞. 칼바람을 가르며 교문을 들어서는 학부모들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2학년 ○반 ○○○ 엄마예요~” “5학년 ○반 ○○○ 아빠입니다.”
학교 보안관실에서 방문증을 받은 안평초등학교 아빠, 엄마들은 이날 교장선생님을 뽑기 위해 강당으로 모였다.
오후 1시30분부터 시작한 ‘학교경영계획 설명회’에는 교장 지원자 5명이 차례로 단상에 올라 각자의 교육관과 학교발전 로드맵을 발표했다. 안평의 청사진을 제시하는 목소리에 자신감이 넘쳤다.
“코딩·로봇교육, 3D프린터 등 소프트웨어 학습활동을 지원하겠습니다!”
“사제동행 높임말 쓰기 운동을 통해 인성·공감교육을 활성화하겠습니다!”
“선생님들의 월 2회 교외연수 및 교직원 건강 프로그램을 지원하겠습니다!”
안평초등학교의 미래교육을 책임질 학교 관리자를 결정하는 자리. 학부모와 교사들은 지원자의 학교경영계획서 요약본을 꼼꼼히 살펴봤다. 볼펜을 쥔 채 경청하며 차근차근 자신의 ‘교장 공모 채점표’에 점수를 기록했다.
예비 교장선생님들은 20여분 발표 제한시간을 빈틈없이 사용했다. 교직생활 가운데 의미 있는 에피소드를 풀어놓거나 삼행시를 활용해 청중의 참여 등을 유도하기도 했다. 교장 지원자들은 발표 뒤 상기된 표정으로 단상을 내려오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학부모와 교사 등 교육주체가 직접 투표를 통해 학교 대표 관리자를 선출하는 ‘교장공모제’는 2007년 최초 도입됐다. 무사안일주의와 보수적 학교 운영 등 기존 연공서열제에 따른 임명제 교장 방식에 혁신적인 변화를 꾀하자는 뜻에서 시작한 제도로 올해 시행 10주년을 맞이했다.
연공서열에 따라 승진·임명된 교장과 달리 공모 교장은 수차례 평가를 거쳐야 한다. 교원, 학부모, 지역사회 인사들이 1차 블라인드 서류심사를 진행하고, 2차 설명회에서 학부모와 교원 채점 결과를 반영한다. 3차 심층면접을 통해 3배수를 선발하고 교육청 공모교장심사위원회 심사를 다시 한 번 거쳐 교육감이 1명을 추천하는 순서로 진행한다.
이 과정에서 교장 지원자는 학교 운영계획은 물론 지역사회와의 협력을 통한 교육공동체 비전 수립, 교직원 지원·관리 등에 대한 학교경영계획서를 제출해야 한다. 부임한 뒤에도 교장 임기 4년 중 절반이 지나면 중간평가를 받는다. 대표 관리자를 선출하는 과정이 쉽지 않은 만큼 공정하고 투명한 심사를 위해 학교 구성원과 학부모들이 힘을 합칠 수밖에 없다.
공모 담합, 1인 단독지원, 지원자가 없어 재공고를 하거나 임명제로 전환하는 등 교장공모제가 제대로 안착하지 못한 사례도 많다. 하지만 서울시 동부교육지원청 관내 일반초등학교로는 처음으로 교장공모제를 시행하게 된 안평초등학교에는 무려 5명의 교장 지원자가 몰렸다.
학창 시절 교장임명제에 익숙한 3040 학부모들이 처음부터 ‘공모 교장’에 관심을 둔 것은 아니었다. 학교 누리집에 올라온 교장 지원자들의 학교경영계획서와 자기소개서를 함께 살펴보고, 교장공모제 제도 내용에 대해 공부하면서 이 제도가 민주 절차에 따라 공정하게 학교 대표 관리자를 선발하는 방식임을 배워나갔다. 학교 교육공동체는 휴대폰 메신저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 정보를 빠르게 공유하기도 했다. 안평초 교장공모제 시행 여부를 결정하는 학부모 의견수렴 설문에는 전체 학부모 1044명 가운데 802명이 참여했다. 이 가운데 78.8%의 학부모가 이 제도 시행에 찬성표를 던졌다.
‘학교경영계획 설명회’가 끝난 뒤 교사 및 학부모들이 ‘교장 공모 채점 기준표’를 작성해 투표함에 넣고 있다.
이날 설명회를 신중하게 지켜보며 채점과 투표까지 마친 학부모들의 소감은 한결같았다. “우리 아이가 다니는 학교의 교장 선생님을 뽑는 거잖아요. 이런 기회가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교육 현장에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모가 학교로 교장 선생님을 뽑으러 간다는 말에 아이들도 큰 관심을 보였다. “엄마, 나는 더 자율적인 학교생활을 하고 싶어. 이 교장 선생님 공약이 좋은 것 같아.” 설명회에 참석한 한 학부모는 “뿌듯했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면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지속적으로 교육정책에 관심을 갖고 참여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전했다.
미국과 영국, 독일, 오스트레일리아(호주) 등 교장공모제가 자리잡은 교육선진국에서는 유능한 교장 후보를 확보하기 위해 관내뿐 아니라 다른 주에서 활동하는 교육자까지 물색한다. 수석교사나 학과 주임교사, 부장, 교감 등 내부 교원을 발탁해 교장 적격자 후보군을 확대하기도 한다.
미국의 경우 학교별 임용 심사위원회는 교원 및 학부모 대표, 지역 인사, 교육행정당국 인사 담당자 등으로 구성하고, 고등학교의 경우 학생 대표가 참여하기도 한다.
영국은 교장 결원이 생기면 언론 매체와 학교 누리집 등을 통해 자격요건, 주요 임무, 봉급 수준, 학교 특성 등을 명시한 초빙 공고를 낸다. 각 학교의 학교운영위원회가 교장 심사 권한을 행사하며, 학운위는 교육청과 협력해 심사 단계별로 지침과 자문·협조를 받는다. 공모 교장 심사에 필요한 가이드라인을 탄탄하게 마련해 서류심사와 심층면접, 평판도 조사를 통한 적격자 그룹을 압축하는 것이다.
경상북도교육청 ‘2016 공모교장 중간평가’에서 우수교로 선정된 성주중학교 이병일 교장은 “교육 현장은 학생, 학부모, 교사가 모두 함께 힘써 만드는 것”이라며 “공모 교장으로서 열정과 의지를 갖고 임하게 된다”고 전했다. 공모 교장이 더욱 능동적으로 교장직을 수행하며 학교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성주중학교는 2014년 9월 이병일 교장 부임 이후 변화가 많았다. 자유학기제 운영 우수교로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표창, 100대 교육과정 우수교 교육감 표창, 사교육 경감 1학교 1특색과제 운영 우수교 교육감 표창을 받기도 했다.
공모 교장 선출 과정은 지역사회의 ‘교육 관심도’를 살펴보는 거울이기도 하다. 안평초 공모 교장 심사위원회에는 학부모, 교사뿐 아니라 지역사회 인사도 포함돼 있었다. 김정호 학교운영위원장은 “학부모들이 교장 선출 과정에 직접 참여하며 민주적인 교육 현장을 경험했다는 게 가장 큰 성과”라고 전했다. “교육공동체가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봤습니다. 제도와 정책을 스스로 공부하고 공유하는 과정에서 많은 학부모들이 ‘혁신교육’을 경험했어요. 어떤 지역 학교의 교육열은 단순히 그 학교가 대학 진학을 얼마나 시켰는가를 두고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소통과 참여가 얼마나 활발하고 자기주도적인지가 그 지역의 교육열을 말해준다고 봅니다.”
글·사진 김지윤 기자 kimjy13@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