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사무실에서 고교학점제 도입과 시행 방향을 모색하는 토론회가 열렸다.
지난달 30일은 1학기 기말고사가 시작된 날이었다. 학생들은 저마다의 시험시간표를 짜서 시험을 치렀다. 예전에는 보통 1, 2교시면 끝났는데 선택과목 수업이 늘면서 시험도 3, 4교시까지 이어졌다. 시험과목에 따라 1교시만 마치고 집에 가거나 3교시에 등교하는 학생도 있었다. 당일 시험과목이 없는 학생은 아침에 출석체크만 하고 집에 갔다. 중간에 비는 시간에는 교내에 마련된 대기실에서 자율학습을 했다.
서울 도봉구 도봉고 이야기다. 이 학교는 올해로 ‘학생맞춤형 과목선택제 개방형 교육과정’(이하 개방형 교육과정)을 8년째 운영 중이다. 1학년은 필수과목 위주로 수업을 듣고 2, 3학년은 모든 과목에 학생 선택권을 부여한다. 선용규 교사는 “필수이수단위 86단위 가운데 국영수 과목을 학기당 10단위로 해 1학년 때 편성한다. 나머지는 학생이 선택해 시간표를 짜도록 한다”고 했다. 이 때문에 전교생이 ‘자신만의 시간표’를 갖고 있다.
1학년 말에 학생들은 선택과목 안내 책자를 받는다. 책자에는 교과별 선택과목에 대한 주요 학습 내용과 관련 수능 영역, 수업 방식 등이 제시돼 있다. 계열에 따른 시간표 예시와 함께 학생들이 필수로 선택해야 할 과목 소개, 한 과목에 편중할 경우 입시에 좋지 않다는 설명도 나와 있다. 학생은 이에 따라 한 학기에 창의적 체험활동을 포함해 총 11과목을 선택한다. 과목을 선택하기 전 도움이 필요하면 교과 교사나 진로진학상담 교사와 상담을 할 수 있다.
필수과목 외 적성·진로 맞춰 교과 선택
문재인 대통령의 교육공약 가운데 하나인 ‘고교학점제’가 이슈로 떠올랐다. 고교학점제는 대학처럼 전공과 선택 과목으로 강의를 나누고 학생이 원하는 과목을 수강하는 방식을 말한다. 2009 개정교육과정은 ‘학생의 과목 선택권을 최대한 보장한다’는 데 목적을 두고 있지만 대부분 학교는 교원 수급이나 수업시수 조절 등 행정 편의에 따라 과목 선택권을 제한하고 있다.
도봉고는 이런 문제점을 인식하고 학생의 흥미나 진로에 따라 다양한 교과 수업을 들을 수 있게 고교학점제와 비슷한 형태의 개방형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가령, 사회 과목을 보면 필수인 ‘한국사’와 ‘공통사회’ 이외에도 ‘법과 정치’, ‘국제 경제’, ‘과제 탐구’ 등을 선택과목으로 개설했다. 첫해는 사전 수요조사를 했고 그다음 해부터는 전년도 수강신청 데이터를 토대로 반을 개설했다.
교과교실제와 연동해 '학생맞춤형 과목선택제 개방형 교육과정'을 운영 중인 도봉고는 과목별로 교실을 나눴다. 교과별 이동수업이 많아 복도에 학생들 개인 사물함을 설치했다.
최소 수강인원 제한은 없다. ‘진짜 필요해서, 정말 공부하기 위해서’ 신청했다면 5, 6명이 신청해도 개설했다. 반면, ‘별생각 없이, 도피성으로’ 친구들이랑 놀려고 ‘영혼 없이 수강신청’한 과목은 일일이 사전 면담을 한 뒤 합의해 폐강하기도 했다.
선 교사는 “2월 한 달 내내 교사들이 과목을 개설하고 시간표를 만드는 데 매달려 있다. 필수과목을 들어야 해서 선택과목을 못 듣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신경 쓴다. 대학처럼 수강신청 시스템이 프로그램화되면 좀 더 수월할 거 같다”고 했다.
사실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과정이 복잡하고 수업이나 평가에 더 신경을 써야 해서 부담이 된다. 하지만 교사들은 ‘아이들이 굳이 안 해도 될 과목을 억지로 하기보단 공부하고 싶은 과목을 선택하도록 보장해주는 게 교사가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실제 재작년 개방형 교육과정 만족도 조사를 한 결과 “성적 향상이나 진로선택에 도움이 된다”, “앞으로도 이 방식으로 운영했으면 좋겠다”는 등 긍정적인 반응이 많았다.
이 학교를 졸업하고 한 대학 바이오생명공학과 1학년에 재학 중인 나미경씨는 “원래 과학에 관심 있던 터라 물리, 생명과학, 지구과학 과목을 선택해 들었다. 중학교 때는 솔직히 쓸데없다고 생각한 과목까지 다 들어서 지루하고 졸렸는데, 고등학교에서 흥미 있는 과목을 선택해 들으니까 수업 집중도도 높아지고 좋았다”고 했다.
“지구과학Ⅱ도 신청했는데 당시 학생 수가 적어 개설이 안 됐다. 10명대가 들었던 물리 과목은 등급 올리기가 힘들었다. 절대평가로 전환해야 학생들이 눈치 보지 않고 과목을 선택하고 신청자가 적은 과목도 개설할 수 있을 거 같다.”
평가방식, 교사수급 문제 해결 등 맞물려가야
나씨의 말처럼 고교학점제 도입을 두고 가장 큰 걸림돌은 평가 문제다. 기존 방식대로 상대평가를 했을 경우 소인수과목이 내신 등급 받기가 불리하다는 것이다. 현 정부는 절대평가는 도입하지 않고 교사별 평가는 도입하겠다는 입장이다.
안상진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정책대안연구소장은 “고교입학제 도입을 위해 선결해야 할 것은 기존 고교 상대평가 방식을 절대평가와 교사별 평가로 전환하는 것이다. 절대평가를 하면 소수 과목 개설이 가능하다. 또 학생 선택권 다양화로 기존의 학년별 평가가 아닌 교사별 평가를 해야 할 텐데 교사 개인이 상대평가로 줄 세우기란 부담스럽다”고 했다.
‘영어교실 구역’이라는 간판이 붙은 복도의 모습과 이동수업이 많아 복도에 학생들 개인 사물함을 설치한 모습.
“이후 대입전형에도 변화가 올 것이다. 절대평가 등급으로 변별력이 줄어들면서 학생부교과전형은 축소할 것이다. 반면, 학생부종합전형은 교과 전형 자료가 풍성해지고 학생부에 대한 정성평가가 중시되면서 질적 개선이 가능할 것이다.”
선 교사는 “우리 학교에 배정받은 학부모들이 내신 등급에 대한 우려를 많이 한다. 하지만 등급제는 수학적 통계의 오류일 뿐이다. 최종적으로 수만 따져서 그럴 뿐 퍼센트(%)로 나누기 때문에 확률적으로 같다”며 “상대평가를 해도 13명 이하 소인수과목은 등급을 내지 않아도 된다. 학생이 좀 더 자유롭게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는 셈”이라고 했다. 하지만 학생들이 ‘원하는 공부’를 하는 대신 ‘추가 시간’을 내야 한다는 점은 부담이다. 이 때문에 현재의 필수 이수 단위 자체를 줄여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이성대 교육연구소 배움 이사장은 교사 수급 문제를 지적하며 “교육과정을 뛰어넘는 다양한 선택과목의 경우 교사 수급을 어떻게 할 것이냐, 교과별 위계가 엄연히 있는데 학생에게 외면받는 교사는 어떻게 할 것이냐”고 했다. “이뿐 아니라 지금은 한 교사가 한 과목을 맡아 학년 전체를 가르치는데 한 교사가 4, 5과목을 가르치거나 수준별 수업을 진행할 경우 업무가 늘어난다. 수업 설계나 평가방식 변화에 따른 수업시수 절감 문제도 함께 다뤄야 한다.”
선 교사는 “고교학점제가 자연스레 안착하기 위해서는 교과교실제와 연동하는 게 맞다. 학급 단위로 움직이지 않고 학생 개개인이 과목별 이동 수업을 하고, 교사들이 이에 따라 다양한 내용과 수준의 수업 방식을 짜기 때문”이라고 했다.
안 소장은 고교학점제가 고교서열화 해소에 어느 정도 도움될 것으로 봤다. “이명박 정부의 고교다양화 정책은 수평적 다양성을 내세웠지만 현실은 수직적 다양성과 서열화를 불러왔다. 일반고가 학생들의 교과 선택권을 넓혀 교육과정이 다양해지면 특목고 교육을 대체할 수 있다. 딱히 자사고가 존재해야 할 이유도 없어질 것이다.”
최화진 <함께하는 교육> 기자
lotus57@hanedui.com
■ 고교학점제 닮은 ‘과목선택제’
우리 학교에 없는 수업, 옆 학교서 들어요
지방교육청 차원에서 고교학점제와 비슷한 형태의 과목선택제 교육과정을 이미 시행 중인 곳이 있다. 세종특별자치시교육청은 ‘캠퍼스형 공동교육과정’을 운영한다. 권역별 거점학교를 두거나 학교 간 정규수업을 공동교육과정으로 운영하는 식이다. 학생들은 소속 학교에 개설되지 않은 과목 가운데 듣고 싶은 과목 수업을 다른 학교에 가서 듣는다. 학교 교육과정에서 개설이 힘든 심화과목, 예체능 실기 전공 및 전공 교과, 전문 교과는 지역전문가를 초빙해 거점학교에서 들을 수도 있다.
현재 심화과목 및 예체능 실기, 전문 교과 등 권역별 거점학교 24개 강좌와 진로전공탐구반 104개 강좌가 개설돼 있다. 세종시 고교생 6600여명 가운데 32%인 2443명이 공동교육과정에 참여하고 있다. 학교혁신과 최병호 장학사는 “우리 프로그램이 고교학점제 선행모델로 인식되고 있지만 사실 ‘학습도시, 세종’을 위한 고교체제 개편 논의안 가운데 하나”라고 했다. 또한 “고교학점제의 성공적 시행을 위해서는 교육과정 이수 단위가 20% 정도 절감돼야 한다”며 “현재 이수 단위가 너무 많아서 학생들이 공동교육과정 수업을 밤이나 주말, 방학을 이용해 듣고 있다”고 했다.
경기도교육청은 2012년부터 전국 최초로 ‘교육과정 클러스터’를 운영 중이다. 초기 일반고 5곳에서 시작해 비평준화 지역과 특목고·특성화고까지 넓혀 현재 201곳 300과목이 선정돼 3000여명의 학생이 수업을 듣고 있다.
교육과정 클러스터란 인근 학교들이 정규 교육과정 교과목 프로그램을 상호 공유하는 무학년제의 학교 간 공동교육과정 시스템이다. 학생 흥미와 적성, 진로와 연계해 실질적이고 특성화한 교육과정을 맞춤형으로 제공하는 것이 목적이다. 실제 개설한 과목도 디자인·공예, 연기, 음악·체육 전공 실기, 로봇 기초, 만화 창작, 프로그래밍 등 진로 관련 과목이거나 공동 교과보다 심화한 내용을 다룬다.
김영숙 교육과정정책과 장학사는 “소수 학생이 선택하는 진로 연계 심화 과목, 전공 교사가 없어 개설하지 못하는 전문교과 수업 위주로 개설했다. 아이들의 지적 호기심을 채우고 교육과정을 내실 있게 운영하기 위해 학기당 3단위로 편성했다. 학생 선택권을 넓혀 맞춤형 교육을 하니 대체로 만족도가 높다”고 했다. 최화진 <함께하는 교육>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