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왼쪽부터 차례로 ’피펫 약통’을 발명한 두루고 2학년 오혜정양
열여덟 고교생 A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막냇동생이 있다. 태어난 지 16개월 된 막냇동생은 유독 감기에 자주 걸렸는데, 약을 먹일 때마다 안심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걱정스러웠다.
영·유아용 액상 감기약은 아기의 건강 상태와 체중 등을 고려해 처방한다. 내성이 생기지 않게 하려면 무엇보다 정확한 양을 복용해야 한다. 한데 대부분 약통은 손으로 눌러 짜는 식이라 병원에서 처방한 4.5㎖가 맞는지 확인하기 어려웠다.
A는 막냇동생의 건강을 위해 안전 약통을 발명해보기로 결심했다. 제대로 된 ‘물건’을 만들기 위해 동네 의원, 약국 등을 찾아 정확한 약 복용법에 대한 조언을 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정량 맞춰 약 나오게 하는 ‘피펫 약통’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세종시 두루고등학교 2학년 오혜정양이다. 오양은 ‘영?유아를 위한 정량 피펫 약통’(이하 피펫 약통)으로 지난 7월 제30회 대한민국학생발명전시회에서 교육부 장관상을 받았다.
오양은 “기존 약통은 표면 눈금이 흐릿할 뿐 아니라, 눌러 짜는 방식이다. 손아귀 힘에 따라 2.5㎖가 3.0㎖가 될 수 있다”며 “막냇동생이 어린이집에 가서도 약을 정량에 맞춰 먹을 수 있어야 한다. 눈이 안 좋은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손쉽게 약을 덜어낼 수 있도록 피펫 약통을 발명했다”고 했다.
피펫 약통 디자인은 사람들이 많이 쓰는 볼펜에서 아이디어를 찾았다. ‘딱딱’ 누를 때마다 볼펜 심이 나오는 원리를 ‘약 계량하기’에 적용한 것. 오양은 “막대를 누른 뒤 용량 단계별로 홈에 끼워 정량을 맞추는 방식이다. 어림짐작으로 약통을 눌러 짜는 것과는 다르다. 피켓 약통을 이용하면 1~3단계에 걸쳐 0.5㎖씩 정확하게 액상 약을 덜어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일상을 관찰하며 ‘어떻게 개선해볼까?’라고 생각하는 습관은 교내 발명동아리 아이디어스(IDUS) 활동을 통해 얻었다. 오양은 “예전 같으면 그냥 지나쳤을 수도 있는 약통이지만, 막냇동생의 건강과 안전을 생각하다 보니 발명으로까지 이어졌다”며 “소수점 첫째 자리까지 맞추는 피켓 약통이 다른 가정에서도 많이 쓰이면 좋겠다”고 했다.
등하굣길 지하철 위험요소 없애는 전광판
최근 지하철 안전사고를 비롯해 지진, 태풍 등 자연재해 등이 계기가 되면서 사회적으로 안전에 대한 관심과 중요성이 부쩍 커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이 안전 교육의 ‘대상’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 안전 관련 발명품을 기획, 구상, 제작하는 사례도 나오고 있다.
지난해 5월 특성화고 졸업생의 지하철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 소식을 듣고, 안전에 대한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된 학생도 있다. 미래산업과학고등학교 3학년 김한슬양은 ‘지하철 스크린도어 안전 전광판’(이하 전광판)을 만들었다. 스크린도어 바닥 부분에 설치한 엘이디(LED) 화면은, 멀리서도 잘 보이도록 커다란 숫자를 10부터 1까지 카운트한다. 눈이 안 좋은 어른들이나 저시력 장애인이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픽토그램도 크게 넣었다. 전광판에는 안전을 뜻하는 초록색 화살표와 위험을 표시하는 빨간색 화살표, 역 이름까지 표시된다.
김양은 “지하철로 등하교를 하기 때문에 구의역 사고가 남 일 같지 않았다. 평소 지하철 문이 닫히기 직전에 슬라이딩하듯 타는 사람들을 보며 정말 위험하다고 생각했다”며 “스크린도어 안에 있는 일러스트 시스템을 활용해 문이 닫히기까지 남은 시간을 표시하는 전광판을 발명했다”고 했다. “멀리 계단에서부터 뛰어 내려와 지하철에 타는 건 위험한 습관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만든 전광판을 통해 지하철 사고 등 위험요소가 줄어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모자로 쓸 수 있는 ‘지진 대비 안전방석’
지난해 9월 경북 경주시에서 발생한 지진을 비롯해 최근 경북 포항에서 일어난 규모 5.4의 지진 등은 우리나라도 지진에서 안전한 국가가 아니라는 걸 실감하게 했다. 내진 설계가 안 된 건물도 문제지만, 지진이 났을 때 안전하게 대피하는 방법을 알고 있으면 그 공포가 덜하지 않을까?
충북 제천시 남천초등학교 3학년 정현지양은 이런 생각으로 지난해 ‘지진 발생에 대비한 안전방석’(이하 안전방석)을 만들었다. 안전방석에는 만일에 대비해 물을 쉽게 마실 수 있도록 한 긴 호스와 호흡기 보호를 위한 마스크, 응급약품 등이 체계적으로 설치돼 있다. 정양은 “평소 학교에서는 방석으로 쓰다가, 지진 등 위급 상황이 오면 방석 안의 각종 안전용품을 꺼내 활용하면 된다”며 “땅이 흔들릴 때는 주변에서 위험한 물건들이 마구 떨어진다. 이때 머리를 보호해야 하므로, 방석 소재를 두툼하고 부드럽게 만들어 모자처럼 쓸 수 있도록 했다”고 했다.
정양을 지도한 남천초 이영상 교사(발명교육센터)는 “평소 주변에서 일어나는 자연현상에 관심을 가져보고, 작은 것이라도 가치 있는 물건을 만들어보면 안전교육과 발명교육을 겸할 수 있다”고 했다. “발명의 최종 목적은 ‘공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전’이라는 주제와 밀접한 관련을 가질 수밖에 없어요. 위험한 환경을 그냥 두고 보지 않고 개선하는 힘을 키울 수 있습니다.”
꾸준한 연구 끝에 지식재산권기구 특별상도
게시물을 부착할 때 뾰족한 압정에 찔린 경험, 그 압정들이 쏟아져 바닥에 흩뿌려진 경험은 누구나 한번쯤 있을 것이다.
두루고 3학년 정효식군은 이런 일상 속 불편한 상황을 어떻게 바꿔볼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러던 중 선생님과 친구들이 압정으로 학교 복도 게시판에 포스터 붙이는 걸 봤다. 소방관을 꿈꾸는 만큼 교내에서도 ‘안전 지킴이’로 소문이 자자했던 정군은 바로 발명 프로젝트에 들어갔다.
고1 여름에 ‘안전하게 압정 박는 법’이라는 아이디어를 떠올린 정군은 1년6개월이라는 시간을 들여 ‘자동 박음 기능 내장형 안전 압정케이스’(이하 압정케이스)를 개발했다. 올해 대한민국학생발명전시회에서 세계지식재산권기구(WIPO) 특별상도 수상했다.
압정케이스는 문구점에서 파는 기존 압정 통을 활용했다. 통을 흔들어 압정 한 개를 자석으로 고정한 뒤, 그대로 누름장치만 누르면 바늘에 찔리지 않고도 충분히 게시물을 부착할 수 있다. 정군은 “이 케이스를 사용하면 날카로운 압정을 손으로 꺼내지 않고도 한 손으로 안전하게 박을 수 있다”고 했다. “소방관이 되어 시민 안전을 위해 일하고 싶어요. 압정케이스를 시작으로 앞으로도 꾸준히 연구하는 ‘발명왕 소방관’이 되고 싶습니다.”
김지윤 기자 kimjy13@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