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낙연 국무총리가 5일 국회 본회의에서 열린 대정부 질문에서 의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연합뉴스
일부 보수언론 및 야당이 역사 교과서 집필 방향을 놓고 또다시 이념 공세를 시도하고 있다. 정부의 교과서 집필기준 시안에 ‘자유민주주의’와 ‘6·25 남침’ 등의 표현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문제제기다. 여기에 이낙연 국무총리까지 나서서 ‘(일부 표현의 누락은) 정부 입장이 아니다’라고 해명해 논란이 커지는 모양새다. 이에 역사학계에서는 “이 총리가 문재인 정부가 역사학계의 요구를 반영해 정한 ‘집필기준 최소주의 원칙’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도 없이 섣불리 사견을 표명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지난 5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최근 소개된 집필기준 시안에 대해 “연구진의 개인 의견”이라며 선을 그었다. 집필기준에 ‘자유민주주의’ 대신 ‘민주주의’가 쓰이고, ‘6·25 남침’ 등의 표현이 빠진 것에 동의하느냐는 물음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총리가 동의하지 않으면 정부 입장이 아닌 것”이라고 말했다.
이 총리의 이날 발언은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폐기하고, ‘점진적 교과서 자유발행제’를 국정과제로 추진하고 있는 새 정부의 교육철학과 동떨어진 인식을 드러낸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정부의 역사 관련 기관장은 “현재 교과서 집필기준 시안은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한다는 취지에 맞춰 마련된 것으로 안다. 총리의 발언은 이런 맥락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비판했다. 한상권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 대표도 “지금껏 역사학계가 왜 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했는지도, 국정화의 폐해도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총리가 잘못된 발언을 했다”고 짚었다.
이번 논란은 지난 1월말 공개된 고교 <한국사> 집필기준 시안에서 비롯한다. 시안에는 현대사의 기술 방향과 관련해 ‘시민사회가 성장하면서 민주주의가 발전하는 과정에 대해 파악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곧바로 일각에서 ‘새 정부가 자유민주주의를 민주주의로 바꿨다’며 문제를 삼고 나섰다. ‘자유민주주의 발전과 경제 성장 과정을 이해한다’(2009 개정 교육과정), ‘자유민주주의의 발전 과정을 이해한다’(2015 개정 교육과정) 등 기존 집필기준과 다르다는 이유에서다.
역사학계에서는 이런 주장 자체가 ‘부분적 사실’에 불과하다고 본다. 1970년대 박정희 정부 시기에 발행된 국사 교과서부터 노무현 정부 시기인 2007 교육과정까지 꾸준히 ‘민주주의’라는 용어가 쓰였고, 이를 되돌려놓은 것이라는 설명이다.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를 교과서 집필기준으로 활용한 시기는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에 그친다. 김육훈 전 역사교육연구소장은 “민주주의란 단어가 언제부터 교과서에 쓰였는지 누구든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문제”라며 “최근 약 10년의 보수 정부를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일축했다.
집필기준을 세세히 나눈 것도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기였다. 애초 집필기준은 2007 교육과정에서 국정 체제였던 역사 교과서를 검정제로 바꾸면서 처음 도입한 방침이다. 당시 집필기준은 중·고교 단일안만 있었고 분량도 많지 않았다. 반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이를 사실상 교과서 ‘검열’의 수단으로 활용했다. 2009 교육과정 집필기준은 분량이 1.5배가량 많아졌고, 중학교와 고교 기준도 따로 나뉘었다. 2015 개정 교육과정에서 나온 국정 교과서 편찬기준은 아예 집필방향과 집필유의점으로 분리돼 더욱 구체화됐다.
이와 달리 이번에 공개된 집필기준 시안은 ‘최소주의 원칙’을 적시하고 있다. 최소한의 헌법적 가치나 민주사회 질서에 어긋나지 않는 수준이라면 역사학자가 자유롭게 집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역사학계의 요구를 반영한 것이다. 조왕호 대일고 교사는 “단순화된 집필기준 아래서 우파적, 좌파적 역사교과서가 다양하게 나오도록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후 학문의 영역에서 경쟁한 뒤 학교의 선택에 맡기는 것이 선진적”이라고 말했다.
이렇듯 학계의 일관된 요구에도 불구하고 굳이 특정 용어를 교과서 집필기준에 포함해야 한다는 일부 주장에 대해 교육계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김태우 전 전국역사교사모임 회장은 “과거의 이념논쟁을 되풀이하지 말고 역사교육의 발전방안을 두고 생산적인 논의를 해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
김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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