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교육

[필진]당신의 속옷은 어떤 색인가요?

등록 2005-11-29 15:21수정 2005-11-29 15:55

만산홍엽, 만추의 강산은 또다시 자신의 변화를 유감없이 드러냄에도 불구하고 이 땅의 청춘들은 무덤덤하다. 무거운 가방을 메고 짧은 머리 칙칙한 교복의 청춘들은 어둡다. 가만 두어도 만산홍엽이 무색하게 더 다채롭고 화사하고 때로는 통통 튀는 생명들이 왜 이리 찌든 모습일까?

우리 아이들은 자신을 표현할 옷이 없다. 풀꽃보다 더 예민한 촉수와 감수성을 지녔음에도, 표현할 자유가 없다. 있는 건 훈육의 의미가 과대포장된 제복뿐이다. 교복은 학교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공동체적 심성을 기르기 위한 것으로 강조되기 시작한다. 나아가 교복은 배움의 시기에 욕구를 다스리는 자기규율이 되고, 지식의 신장이 중요하기에 자유가 유보되는 사례가 되고, 그래서 높은 학업 성취를 올리고 유망한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공부에 전념해야 하는 것이니, 미래의 성공과 행복을 담보하는 증표가 된다.

교복입고 애국조회. 2005년 대한민국의 학교.

여기까지면 그나마 봐 줄만한 것인가? 허나 제복의 속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제복의 획일성은 포악하다. 그 획일성과 억압기제는 머리털의 길이 제한으로 이어지고, 신발, 양말 색으로 확장된다. 여학생들의 머리띠도 갈색은 되나 분홍색은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속옷은 무슨 색으로 입어야 할지 허락을 득해야 하는 지경에 이른다. 타율적 억제와 획일성이 내면화되는 것이다. 이게 과장이라고 생각된다면, 이미 순응과 절망의 기제에 젖은 아들 딸 혹은 조카에게 물어보라.

예전 모자와 후크까지 채우고 교문을 들어서면서 규율부의 얼차려가 일상사였던 것에 비하면 많이 좋아진 것이니 그 정도는 견딜 만한 것으로 보는 이들이 적지 않다. 교복 자체도 디자인이 다양해졌고 통제와 강압도 완화된 것을 강조하는 이들은 곧 학부모들이기도 하다. 강한 주관적 체험을 강조하다 객관적 오류를 저지르는 경우가 아닐 수 없다. 21세기라는 상황 변화도 그렇지만, 다소 완화됐다고 해서 그 본질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의 본질은 그대로 둔 채 증상을 완화시키는 처방은 문제를 문제로서 인식하지 못하는 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는 것이다.

다 제각각 자유롭고 표정이 살아 있다. 교복 없는 대안학교 학생들

이런 상황에 교복이 아닌 옷을 입고 머리에 염색이라도 했다 치면, 이건 영락없는 불량배 취급을 받는다. 공부는 아예 하지 않고 머리는 텅 빈 놈으로 간주된다. 몇 안 되는 대안학교의 학생들은 그런 불편한 경험을 토로하기도 한다. 그러나 피어싱과 염색의 유무가 도덕의 유무로 연결되지 않는다. 성적과도 별개이다. 자신을 화려하게 꾸미는 것은 기질, 가치관, 미학의 표출인 것인지 도덕성만의 표현도 아니고 성적을 표현하는 것도 아니다.

근대 이전 옷은 계급과 신분의 표현이었다. 지금도 특수한 신분과 직업은 제복을 요구하고, 사회에서는 그 필요성을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 아이들은 특수한 신분과 직업의 필요에 의해서 제복을 입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규율과 규제의 차원이고, 청산하지 못한 군국 군사주의의 유물인 것이다.

옷은 통제의 수단이 되어선 아니 된다. 학업에 전념하기 위해 교복을 입고 머리를 자르고 양말과 머리띠가 통제되고 제한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미래를 위해 오늘의 행복을 유보하는 것은, 결국 오늘도 행복하지 못하고 미래도 행복해질 가능성이 낮다. 현재를 행복하게 보내는 사람이 미래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이다.

옷! 이것도 학업이다. 나를 표현하는 것이야말로 심도 있게 배워야 할 부분이다. 옷은 또 철학과 미학이다. '나'를 드러내는 과정은 가치관과 미학의 통합 작업이다. 내면의 자아를 만나고 현실의 다중 앞에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옷이다. 끊임없이 나를 표현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역할 기대를 자연스럽게 습득하는 것이 옷이다.

기운생동 생기발랄한 생명들이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하고, 그 다채로움 속에서 개성을 배우고 공존의 논리를 터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1센티 길다고 가위질을 해대고, 양말과 속옷 색깔까지 따지는 상황에서 무슨 창조성을 기대하고, 미래를 꿈꿀 수 있을까. 아이들을 언제까지 19세기에 가둬둘 것인가.

| 한겨레 필진네트워크 나의 글이 세상을 품는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1.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2.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3.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4.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5.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