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 ㅁ초등학교 급식실 노동자가 뜨거운 열기를 견디며 작업하고 있다.
학교는 단지 학습하는 공간을 넘어 아이들이 자라는 곳이다. 아이들을 먹이고, 학교에 남은 아이들을 돌보고, 여러 예술·체육 활동을 즐길 수 있게 하고 혹시 마음이 다치지는 않았는지도 살펴야 한다. 모두 아이들을 키우는 일이지만 교사가 이 모든 것을 담당하기엔 역부족이다. 학교는 이들을 강사로, 돌봄전담사로, 상담사로, 영양사로, 조리원으로 다루고 세상은 이들을 ‘아줌마’로 부르기도 한다. 학생과의 관계 속에서 얻는 보람과 학교라는 시스템 속에서 받는 차별 사이에 이들의 삶이 놓여 있다.
<학교에 일하러 가는 사람들>은 학교 비정규직 노동의 실제와 의미를 생생하게 보여주려 현장 취재 내용에 문학적 요소를 가미했다. <한겨레>는 ‘전국교육공무직본부’의 기획으로 이철 작가가 본 학교 현장을 매주 한 차례씩 모두 10회에 걸쳐 싣는다.
하얀색 면티와 검은색 고무줄 바지로 갈아입은 이동화 씨가 소독고 문을 연다. 위생모와 앞치마, 고무장화와 고무장갑을 꺼낸다. 커다란 앞치마를 둘러매니 밑단 아래로 신발코만 비죽 나왔다. 고무장갑은 팔꿈치를 덮었다. 위생모와 마스크까지 쓰니 물 한 방울 젖지 않을 거 같다. 이동화 씨는 학교 급식실 조리사이다.
“우리가 뜨거운 기름도 다루잖아요. 오븐은 280도나 돼요. 솥에서 물을 끓여서 여기 저기 퍼 나르기도 하고요.”
급식실 노동자가 출근 후 처음 하는 일은 ‘완전 무장’을 갖추는 일이다. 기본적으로 위생을 위해 착용하는 것이지만, 뜨거운 기름과 물이 수시로 튀는 환경으로부터 노동자를 보호하는 장비이기도 하다. 평소 소독고에 넣어 보관하는데, 소독고 자외선 푸른빛에 감싸여 있으면 미래의 기술이 적용된 최첨단 장비처럼 보인다.
“이걸 꺼내 입으면 아, 이제 시작하는구나, 싶죠. 마음가짐이 달라져요. 급식실이 잘 정돈돼 보여도 위험한 게 많거든요. 튀기고 끓이는 건데, 잠깐 한눈팔면 화상은 금방이에요.”
의정부 ㅅ초등학교 급식실 노동자들이 천장에 설치된 배기용 덮개를 청소하고 있다.
의정부 ㅅ초등학교 급식실 노동자들이 천장에 설치된 배기용 덮개를 청소하고 있다.
삽인 줄 알았던 주걱을 들고 1900인분 조리
하루에 다루는 무게 8톤…코끼리 두 마리 체중
학교 외 공공기관의 2~3배 식수 인원 감당
돌봄전담사, 상담사, 영양사, 조리원, 강사
학교 비정규직 40만명, 정규직 교육공무원 6만명
학부모여도 이곳 노동자 된 순간 ‘가장 낮은 신분’
학교 급식실 노동자들이 이렇게 갖춰 입는 건 음식을 세균과 이물질로부터 단절시키는 장치이면서, 내 몸을 위험한 환경으로부터 보호하는 장비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아이들로부터 거리를 만들어내는 장벽이 되기도 한다. 똑같은 옷을 입고 커다란 앞치마로 온몸을 둘러싸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가려진다. 그래도 이동화 씨는 아이들이 예쁘다.
“처음 이 학교에 왔을 땐 막 개교 했을 때라 애들이 300명 정도 됐어요. 그땐 얼굴을 다 알았어요.”
나를 가릴 수밖에 없어도 아이들 예뻐하는 마음은 자연스레 드러난다. 졸업한 아이들이 찾아와 급식 한 번 먹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건 음식의 맛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을 만드는 손길을 정겹게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 그냥 하는 게 아니다, 무겁고 생각보다 위험하다
오늘 식단은 보리밥과 냉이달래 된장국에 두부 샐러드와 배추김치, 주 반찬은 멘츠카츠이다. 이른 아침에 식재료들이 속속 도착한다. 영양사와 함께 원산지와 제조 일자, 유통기한을 확인한다. 냉장 냉동식품은 물론 채소까지 하나하나 온도를 재고 기록한다. 검수가 끝나면 재료를 씻고 다듬는다.
쏴~아! 개수대의 수도꼭지가 일제히 물을 쏟아낸다. 조리실무사들이 저마다 맡은 재료를 씻고 헹군다. 양상추처럼 생으로 먹는 채소는 소독까지 한다. 통조림 옥수수도 그냥 쓰지 않는다. 솥에서 끓인 물을 부어 씻는다. 샐러드 하나 만드는 데에도 절차가 번거롭다. 식중독 같은 급식 사고 예방을 위해선 반드시 지켜야 할 절차들이다.
“전에 있던 학교에선 1600명 밥을 했어요. 게다가 고등학교라 애들이 많이 먹잖아요. 고기 양만 거의 300킬로. 거기에 부재료 있죠, 밥을 한 번 하면 쌀이 200킬로인데 잡곡까지 넣으면, 230킬로 정도 나왔어요.”
양선희 씨는 2001년부터 학교 급식실에서 일했다. 급식실에 들어간 첫날, 삽인 줄 알았던 주걱을 보고 놀랐다. 솥은 1200명분을 조리할 수 있는 크기였는데, 물을 담아 몇 명이 함께 목욕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하루 1900명분의 밥을 했다. 이제껏 내 몸이 겪어보지 못한 일들을 하나씩 겪어나갔다. 고기를 양념할 때면 양이 너무 많아, 내 몸이 고기와 함께 양념에 절여지는 것 같았다.
학교 급식실 노동자 1인이 하루 동안 들고 내리는 무게의 총량은 8톤. 대략 코끼리 두 마리의 무게다. 근육과 관절에 무리가 올 수밖에 없다. 열에 아홉이 관련 질환자다. 조리실무사 한 명이 감당하는 식수 인원은 평균 150명. 학교 외 공공기관 평균의 2~3배이다. 여름엔 조리실 온도가 50도 이상으로 올라, ‘쌀이 익는 건지 사람이 익는 건지, 헉헉 소리가 나는 현장’이 된다. 겨울엔 후드로 더운 공기가 빠져나가 춥고, 바닥은 살얼음판이 된다.
급식실은 무겁고 뜨거운 것을 다룬다. 많은 양의 음식을 육중한 솥에서 지지고 볶고 끓인다. 음식을 솥째로 들어 옮기기도 하고, 현장에서 밧트(vat)라고 부르는 스테인리스 사각 통에 담아 옮기기도 한다. 음식을 채우면 무게가 20킬로를 훌쩍 넘는다. 솥에서 끓인 물을 ‘다라이’로 퍼 나르기도 한다. 후드에 맺힌 기름을 닦아내기 위해 솥을 밟고 오르기도 한다. 데이는 일, 손목이 욱신거리는 일은 일상이다. 후드를 닦다가 솥에서 떨어지기라도 하면 작은 부상으로 끝나지 않는다.
덮개(후드) 청소는 안전장치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진행된다.
■ 저마다 사연을 안고 아이들은 자란다
12시45분.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린다. 배식 준비를 마친 조리사들의 시선 모두가 식당 출입문을 향한다. 기척이 없다. “왜 안 와?” 세 명의 아이들이 먼저, 서로 질세라 모습을 드러낸다. 서로 잡아끌며 배식대로 달려든다. 이내 아이들의 활기가 출입문까지 이어진다. 아이들은 저마다 할 얘기가 많다. 들뜬 목소리가 급식실에 차오른다.
식판과 수저를 챙겨 든 아이들이 배식대를 지난다. 잘 먹겠다고, 고맙다고 인사한다. 배식대 너머로 인사를 건네는 아이도 있다. 조리사들의 손놀림이 바빠진다. 10여 분 사이 360석 테이블이 가득 찼다.
“밥 먹을 때 등교하는 애들이 있었어요. 11시40분 정도. 밥 먹으러 오는 거예요. 중학교 3학년 애들은요, 우스개로 어른 흉내를 내며, 저 국 많이 주세요, 속 쓰려요. 이랬어요.”
양선희 씨가 지금 학교로 자리를 옮긴 건 2011년, 학교가 개교할 때다. 학생수가 300명이 채 안 됐다. 전학을 온 아이들이 많았다. 전학 온 아이 중에는 사고뭉치 아이들도 더러 있었다. 중학교까지는 의무교육이라 가장 큰 징계가 전학이다.
안양 ㅁ초등학교 급식실에서 노동자들이 식재료를 국솥에 넣고 있다.
“그냥 점심 먹으러 오는 거예요. 다른 거 없어요. 하루 와서 점심 먹고 그냥 잘 놀다 가는 거야. 무상급식이 왜 중요한지 느낌이 안 오세요?”
학교에는 이런저런 아이들이 있다. 교과 공부에 뜻이 없는 아이들도 있기 마련이다. 학교 공부에 노력하는 아이들을 평균값으로 보는 사회에서, 이런 아이들은 좋은 시선을 받기 어렵다. 그래도 이 아이들 또한 학생이다. 점심이라도 먹으러 학교에 오는 아이들. 이런 아이들이 학교 외에 어딜 가야할까.
1996년 학교급식이 본격화된 다음 해, 한국사회는 외환위기를 겪는다. 대량 실직 사태가 일어나고, 밥을 못 먹는 학생들이 늘어났다. 1999년 법을 개정해 국가에서 급식비용의 50% 이상을 지원하도록 했다. 돈을 내고 밥을 먹는 아이들과 그렇지 않은 아이들이 구분됐다. 아이들 사이에서 밥 먹는 문제로 갈등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비정규직과 임시 고용직 자리가 늘어나면서, 사람들은 양극화라는 사회적 문제를 몸으로 알게 됐다. 이런 사회에서 세상을 시작한 아이들은 미래를 기대하기 어렵다. 그런 탓에 많은 아이가 학교를, ‘그냥’ 다닌다. 이혼율이 증가했고, 국제결혼은 낯설지 않았다. 학교에는 한부모 가정, 다문화 가정 등 저마다 어려움을 지닌 아이들이 늘어났다. 학교에서 먹는 한 끼가 전부인 아이들도 있다.
2009년 경기도 교육감 보궐선거에 김상곤 교육감이 당선됐다. 보편적 교육복지를 실현할 정책으로 무상급식을 공약했다. 복지문제가 해결 안 되면 교육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관점에 많은 사람이 동의했다. 급식실 노동자는 한목소리로 말한다. 무상급식은 아이들을 학교라는 울타리로 잡아끄는 중요한 장치라고.
■ 아이들은 학교에서 차별과 천시를 목격하며 자란다
학교는 공부하는 곳이다. 1997년 외환위기를 겪기 전까진, 학교는 오로지 공부만 하고, 교과서만 파는 곳이었다. 그래서 학교를, 교사와 학생이라는 두 축으로 이해해도 무리가 없었다. 오래전 그 시절 학교엔 교사와 학생, 그리고 한두 명의 ‘소사 아저씨’가 전부였다. 2017년 기준 초중고 전체 교사 수는 43만명. 급식, 돌봄, 복지, 행정지원 등 아이들을 돌보고 교사들의 수업을 돕고 함께 하는 학교 비정규직은 약 40만명이다. 정규직인 교육공무원 수는 6만이 전부다. 학교는 공부 그 이상, 이제 아이들을 키우는 곳이 됐다. 그리고 차별을 목격하고, 그것을 알게 모르게 체득하는 현장이 되기도 했다.
“저는 학교가 굉장히 좋은 줄로만 알고 들어가 일했거든요. 내 모교고, 우리 딸이 다니는 학교여서 손잡고 들어갔는데, 학부형이었고 녹색어머니회부터 다 했는데, 선생님 제가 시월달부터 일해요, 여기 급식실에서 일해요, 그랬더니 학부모에서 급식종사자로 딱 신분이 바뀌더라고요.”
김영애 씨는 2004년부터 급식실에서 일했다. 그때부터 딸아이의 학예회와 운동회를 못 가게 됐다. 학교모니터링, 녹색어머니회 등 학부모 참여형 프로그램도 멀어졌다. 그렇게 ‘가장 낮은 신분’으로 바뀌는 것을 경험했다.
“학교 들어오기 전에는 주부였어요. 시부모랑 같이 사니까 답답하기도 했고 밖에 나가서 일하고 싶었는데, 식구들이 다 가지 말라고 했어요. 그런데 학교는 가래. 그래서 정말 좋은 곳이다 생각하고 왔는데...”
최춘월 씨는 급식실 20년차다. 처음엔 ‘구정물에 손을 담그고, 먹다 버린 음식에 손을 대는 일’이 창피했다. 학교 안에서 무시당하는 일도 많았다. 그래도 아이들에게 좋은 음식을 제대로 먹이고 싶은 마음이 컸다. 서른아홉 살, 늦은 나이에 대학을 들어갔다. 식품학을 배우고 대학원까지 진학해 식품공학을 전공했다. 그러다 2009년 노조를 만들기로 했다. 월급으로 70만원 정도를 받을 때였다.
의정부 ㅅ초등학교 급식실 노동자들이 천장에 설치된 배기용 덮개를 청소하고 있다.
이시정 씨는 당시 민주노총에서 나와 비정규직 문제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들을 만나 얘기를 듣고는 처우 개선이 쉽겠다고 생각했다. 너무나 열악했기 때문이다.
“2008년도에 공무원 조리사 한 분이, 조리 실무사 비정규직 한 분을 데리고 온 일이 있어요. 이거 너무하다고. 그때 얘기를 들어보니까 기가 막히더라고. 내가 그래도 노동 문제 전문가인데, 학교에 비정규직이 있다는 건 알았는데, 그래도 공공기관에 있는 비정규직은 조건이 괜찮을 거다, 막연한 생각이 있었는데 아니야. 얘길 들어보니까 너무나 기가 막혀요.”
급여는 기본급이 전부였다. 그것도 일하는 날수로 계산했다. 일은 하루 배식이 끝날 때까지 화장실 갈 시간조차 내기 어려운 중노동이었다. 몸을 다쳐도 대체 인력이 없어 병원에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천대받는 일이 많았다. 학생들 앞에서 조리종사원을 가리키며 ‘너네 공부 안하면 저렇게 돼’라고 말하는 교사도 있었다.
■ 지금도 아줌마?! 학교 담장은 여전히 높다
2009년 2월 병점에서 오산 넘어가는 세마대고개에서 급식조리원 10명이 모였다. 한 음식점이었다. 당장 노조를 만드는 것은 부담이 되니, 연합회 형식의 조직을 만들기로 했다. 이시정 씨는 학교비정규직노동자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이름을 제안했다. 전국학교비정규직연합회.
“그런데 이게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어요. 비정규직이 듣기 싫다는 거예요.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하는데 듣기 싫은 거야. 그래서 학교가 그렇게 열악한데도 실태가 안 알려진 거예요. 사람들이 너 어디 다니냐 물으면, 학교요. 그러면 괜찮은 직장에 다닌다고 생각해주니까.”
교육부에서 부르는 이름을 쓰기로 했다. ‘회계직’이었다. 학교 회계에서 인건비가 나간다는 이유로 붙인 명칭이었다. 지위를 보장하는 법적 근거도 없었다. 교육부에서도 이들을 뭐라고 불러야 하는데, 마땅한 명칭이 없었다. 새마대고개의 한 음식점에서 전국교육기관회계직연합 준비위(이하 전회련)가 발족했다.
“우리가 가장 먼저 한 게, 사람들의 자존감을 높여야겠다, 유령 취급받고 그러니까. 우리도 호칭을 선생님으로 부르게 해달라. 돈 들어가는 것도 아니잖냐, 난 굉장히 쉬울 줄 알았어요. 그런데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어요.”
임용고시도 안 본 사람을 왜 선생님이라고 하냐는, 교사들의 항의였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간부 중에도 같은 얘기를 하는 이들이 있었다. 학교에 들어서는 순간 모든 사람은 교육과 연관된다.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무리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많은 교사가 시험을 기준으로 자격 문제를 언급했다.
“아이들 앞에서 아줌마! 이렇게 부르시는 교사님도 계세요. 그래서 다시 교직원 회의 시간에 영양교사님께서 그렇게 하지 말아달라 얘기하셔도, 급식실 와서, 아줌마! 또 이렇게 부르시는 거예요.”
호칭에 관해 교육청에서 보내는 공문이 학교로 내려가도, 아줌마! 라고 부르는 교사는 여전했다. 18년 차 조리사 심영미 씨는 여러 학교의 홈페이지 살폈다. 급식실 노동자를, 학교를 구성하는 일원으로 생각해주는 학교가 많지 않았다.
■ 아이들은 안다, 이들이 왜 선생님인지
배식이 끝났다. 아이들이 모두 빠져나가 급식실이 휑하다. 배식 안 된 음식들을 따로 담는다. 독거노인들에게 전달할 것들이다. 조리사들이 바삐 움직인다. 후처리실로 세척할 그릇과 도구들이 밀려든다. 이동식 세정대 두 대에 겹쳐놓은 식판을 가득 채운다. 뜨거운 물을 부어 불린다. 버려진 음식을 처리하고 배식에 썼던 도구들을 씻는다. 수저는 따로 모아 끓는 솥에 넣는다. 식판과 수저에 말라붙은 음식 찌꺼기가 부는 그때서야 급식실은 잠시 여유롭다.
안양 ㅁ초등학교 급식실 노동자가 식판을 옮기고 있다. 세척된 식판을 소독고에 넣고, 다시 교실에 올리는 작업을 하루 세 번 반복한다.
“남의 입에다 맥여 주는 게 최고지.”
오성희 씨는 22년 차 조리사다. 1995년부터 지금까지 한 초등학교 급식실에서 일했다. 내가 만든 음식을 아이들이 맛있게 먹어준다는 게 보람이다. 아이들 입으로 들어갈 때가 참 좋다. 열심히 일한 결과를 남한테 주는 거라서 그렇다.
“1학년 애들은 교실에서 급식을 하는데 가서 배식할 때면 애들이 ‘선생님, 저 초록색 다 먹었어요’, ‘선생님, 저 이빨 빠졌어요’ 이래요. 얼마나 예쁜지 몰라.”
오후 3시. 식판을 세척할 때다. 애벌 세척기와 자동 식기세척기가 모두 가동된다. 애벌 세척기로 식판에 붙은 음식물 찌꺼기를 떨구면, 다음 사람이 식판을 받아 자동 식기세척기에 꽂아 넣는다. 컨베이어 타입에, 길이만 6미터 가까이 된다. 식판이 세척, 헹굼, 건조 구간을 천천히 지난다. 기계는 안에서 뜨거운 물을 뿌려대고 뜨거운 바람을 쏘아댄다. 후처리실이 후끈 달아오른다. 한쪽 끝에서 깨끗해진 식판을 차곡차곡 쌓아 소독고로 옮긴다. 내일 또 다시 아이들은 이 식판에 제 먹을 걸 받아 들 것이다. 이제 조리사들이 하나둘 위생모를 벗는다.
이철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