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우연히 학교 게시판에서 야학교사를 모집하는 글을 보았다. 게시물은 너무도 열학한 교육 환경에 처해 있는 포이동 판자촌 아이들에 대한 사연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바로 앞 타워팰리스에 사는 또래 아이들에게 거지라고 놀림받는 것으로도 모자라, 어느 날 고층에서 던진 물건에 맞아서 판자촌 아이가 다쳤다고 한다. 다친 아이의 어머니가 항의를 위해 타워팰리스 건물로 찾아갔지만, 무인경비 시스템이 설치된 입구를 통과하지 못하고 서러움에 눈물을 흘리며 되돌아왔다는 사연이었다. 거기까지 읽고, 나 역시 눈물이 났다. 사연에 담긴 서러움이 느껴져서였기도 했고, 내 자신에 대해 불현듯 죄책감이 들어서였기도 했다.
이런 저런 이유로 그동안 야학이란 것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도 없었다. 대학생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지만, 경제적 평등이나 노동자의 권익 등을 고민하고 외치는 것 정도로만 여기고 있었다. 그런 중에, 이 한 장의 게시물이 그 모든 외침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가난이 되물림되고 있으며, 그것을 방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교육을,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대학생이 실천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깨닿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공교육 정상화와 대학 서열화의 폐지등, 큰 과제들을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보수적인 기득권 세력이 대를 이어 세력을 유지한다면, 이후 어떠한 진보적 변화도 도모하기 어렵다. 주류 교육 세태로 부터 소외된 학생들에 대한 '사교육'의 필요성이 바로 거기에 있다.
야학을 지도하기 위해 대단히 큰 투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중 고등학교 시절을 이미 겪어 본 사람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단 몇 시간의 상담과 방향 설정만으로도 학습 효과는 대단한 차이를 보인다. 그러한 지도에 목말라 있던 의욕있는 학생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사교육은 고사하고, 학교 공부에도 집중하기 힘든 환경의 아이들이었지만, 그러한 기회만 있다면 얼마든지 기대 이상의 실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우리는 안다.
자본이라는 괴물이 끝없이 성장하고,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고착화 될 수록 그것을 뒤집거나 최소한 개선할 수 있는 여지는 줄어든다. 저항 의식을 지닌 사람들 조차, 두터워지는 극빈층 안에서 자신의 생계 유지를 위해 발버둥쳐야 하기 때문이다. 대학이 취업학원화 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할 때, 대학생들이 야학을 실천할 수 있는 가능성 또한 점차로 줄어들게 될 것이다. 더 늦기 전에 무언가 해야 한다는 조바심이 생긴다. 이제 곧 졸업을 하지만, 이후 자리가 잡히는 대로, 야학을 실천할 기회를 마련할 생각이다. 이 땅의 많은 대학생들이 조금만 여유를 내어, 그러한 결심에 동참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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