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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띵곡’ ‘갑분싸’…급식체로 사전을?

등록 2019-09-17 11:03수정 2019-10-08 18:22

【왕용샘의 ’학교도서관에서 생긴 일’】
국어과 선생님과 협력수업 중 광양백운고 학생들과 만든 ‘급식체 사전’을 실제 책으로 펴냈다. 황왕용 교사 제공
국어과 선생님과 협력수업 중 광양백운고 학생들과 만든 ‘급식체 사전’을 실제 책으로 펴냈다. 황왕용 교사 제공
“선생님, 학생들이 세대 간 소통 단절의 원인으로 ‘급식체’를 뽑았어요. 급식체로 활동 수업을 하고 싶은데 좋은 생각 있어요?”

지난해 4월, 국어 선생님께서 도서관에 찾아와 이야기하셨지요. ‘마음을 잇는 소통의 창’이라는 수업에서 세대 간 소통이 원활하지 않다는 점에 공감하고, 그 이유를 조사하는 숙제에 급식체를 답으로 써낸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급식체란 급식을 먹는 세대, 즉 10대들이 자주 사용하는 문체라고 해서 붙은 명칭으로, 초·중·고 학생 사이에서 사용되는 은어를 말합니다.

저는 협력수업을 제안했습니다. 수업의 핵심은 불통의 원인인 급식체를 소통의 매개로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역발상이지요. 그리하여 수업은 각자의 ‘급식체 사전’을 만드는 3시간짜리 프로젝트 수업이 됐습니다.

고등학생인 제자들은 부모와 이야기할 시간도 없을뿐더러 학교생활을 공유하지 않는 편이 더 많습니다. 그들만의 문화가 형성돼 있고, 그건 부모 세대와는 다른 것이기 때문이지요.

문화를 형성하는 것에는 여러 요인이 있지만, 언어 또한 한몫을 담당합니다. 언어는 하나의 집임을 인정하고, 무시하지 않는 방식으로 접근했습니다.

수업은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학생들은 자신 또는 친구들이 쓰는 급식체를 마음껏 말할 수 있었습니다. 국어 시간에 급식체를 외치도록 할 수 있다니요? 염려스러운 점도 있었지만 학생들을 믿고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각자가 말한 급식체 세가지를 골라 책에 정리했습니다.

책은 머메이드지를 이용해 기본 책 접기를 했습니다. 손으로 만든 소박한 꼴의 책에 아이들이 내용을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표지에는 책 제목, 그림, 지은이 등을 썼습니다. 본문에는 학생들이 조사한 급식체의 뜻, 상황·경험적 정의를 담은 ‘이럴 때 쓴다’, 부모님과 급식체를 매개로 한 대화 내용을 담은 ‘엄마가 너만 했을 땐!’ 등으로 구성했습니다. 뒤표지는 책을 완성한 뒤 친구들의 추천사를 받아 정리했지요.

수업 목표는 급식체를 정의하고 공부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모 세대가 10대의 문화를 반영한 급식체를 인정한 뒤 대화의 물꼬를 트는 게 목적이었지요. 학생들은 자신의 문화를 인정받고, 부모를 대화의 상대로 수용하며 소통을 시작하고자 했습니다.

한 학생의 숙제를 엿봅니다. “엄마, ‘띵곡’이라는 말 알아?” “띵곡? 머리 아프니?” “아니, 급식체 사전 만들기 숙제인데 ‘명곡’이라는 뜻의 급식체야. 잘 보면 글자가 명곡처럼 보여서 생겨난 말이지. 엄마가 나만 했을 때는 명곡이라는 말을 지칭하는 은어 같은 거 없었어?” “글쎄, 그냥 ‘십팔번’ 정도?” “엄마의 십팔번은 뭐였어?” “강수지의 ‘보랏빛 향기’?” 모녀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아버지가 옆으로 다가온 다음엔 ‘띵곡’에 대한 이야기는 서로 좋아하는 노래 이야기로 번졌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가족이 처음으로 노래방에 가기로 했다더군요.

급식체를 시작으로 소통의 실마리를 제공하려고 시작한 수업이 가족을 함께 노래방으로 보냈습니다. 물론 모든 가족이 그렇지는 않았지만, 많은 학생이 긍정적인 피드백을 주었습니다. 학생들의 수업 소감 가운데 일부를 옮겨봅니다.

‘평소에 어른들이 급식체를 안 좋게 보시는 경우가 많아 이 사전을 만든다고 할 때 되게 신기했다’(허선영 학생), ‘세대 간 떨어져 있던 언어를 연결고리로 서로의 이야기가 통하는 느낌이 들어 뜻깊은 시간이었다’(김시형 학생), ‘부모님의 어린 시절, 학창 시절, 연애 시절까지 알게 됐고, 우리 엄마·아빠에게 이런 새로운 면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됐다’(김재이 학생), ‘소통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 그 시작이 <급식체 사전>이 아닐까 싶다’(최아영 학생).

황왕용 광양백운고 사서 교사, <학교도서관 활용 수업: 중·고등> 공저자

황왕용 광양백운고 사서 교사, <학교도서관 활용 수업: 중·고등> 공저자
황왕용 광양백운고 사서 교사, <학교도서관 활용 수업: 중·고등> 공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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