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ㅣ10대를 위한 자기방어수업
설 명절이 다가온다. 열세 살 수빈이는 자꾸만 신경이 쓰이는 일이 있다. 지난 추석 때, 오랜만에 만난 삼촌이 와락 끌어안고 볼에 뽀뽀했던 일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사촌들과 함께 우르르 현관으로 달려나가 인사를 나눌 때, 엉덩이를 삐죽이 내밀고 몸을 비틀어 거리를 만들어내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삼촌은 내가 싫어한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게 틀림없다. 똑같은 행동을 헤어질 때도 했으니까. ‘삼촌은 위험한 사람이 아닐까? 왜 다 큰 조카한테 뽀뽀를 하고 난리야!’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곧 죄책감도 들었다. 원래는 아무렇지 않았던 것이 이제는 딱 싫어졌기 때문이다. 삼촌은 수빈이와 사촌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예전부터 재미있게 놀아주던 삼촌이다. 수빈이도 삼촌을 만나면 반가운 마음이 들고, 장난을 치고 싶었다. 유쾌한 응답이 돌아올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 삼촌을 괴물처럼 생각해서 미안했다.
화가 나는 동시에 죄책감이 드는 것, 그것은 수빈이의 문제가 아니다. 수빈이가 거절하는 일에 대해 망설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가족은 여러 사람이 모여 만든 사회이다. 가족이나 친척처럼 가까운 사이는 신뢰와 사랑으로 안정이 느껴지기도 하고, 그 안에서 갈등과 폭력이 일어날 수도 있다.
우선은 수빈이가 원하는 관계, 바라는 모습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보자. 껴안고 뽀뽀하지 않더라도 삼촌이 위험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떨쳐지지 않는지, 이제는 누구라도 함부로 껴안고 뽀뽀하는 것이 싫은지, 너무 어린아이를 대하는 듯한 행동이 싫은 건지, 이것이 삼촌과 조카에게 걸맞은 일인지. 스스로에게 묻고 답하다 보면 나의 바람이 좀 더 분명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행동이다. 수빈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다. 친구들과 이 문제를 놓고 미리 이야기해볼 수 있다. 삼촌을 맞이하는 현관 앞에서 손바닥을 들어 거리를 만들어둔 다음에 “삼촌, 이제는 껴안지 마세요”라고 말할 수 있다. 어머니께 도움을 청해볼 수도 있다. 사촌들과 함께 의견을 나누고 생각을 모아서 삼촌에게 진지하게 전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이번에는 삼촌이 어떻게 반응을 할지를 예상해보자. 첫째, 삼촌이 “그랬어? 불편했구나. 몰랐어. 미안해. 다음부터는 조심할게”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표현이 다르더라도 말하자면 수빈이의 거절을 받아들일 수 있겠다는 뜻이다.
두 번째, “거참, 별소리를 다 듣겠네”라고 말하면서 명절 내내 말을 걸지 않다가 헤어질 때는 “그렇게 싫다니까 말로만 인사할게”라며 마음이 상한 티를 팍팍 낼 수도 있다. 수빈이의 거절에 대해 화를 내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세 번째, “삼촌이 너를 얼마나 귀여워하는데!”라고 하면서 헤어질 때는 다시 한번 끌어안으려고 잡아당길 수도 있다. 만약 실제로 일어난다고 상상하면 머리에 경고등이 켜진다. 삼촌은 위험한 사람이고, 이것은 명백한 폭력이다.
‘거절은 새로운 관계로의 초대’라고 했다. 수빈이가 슬금슬금 삼촌을 피하면서 마음속으로 불안을 키우거나 자신을 미워하는 대신, 거절하기를 선택함으로써 정말로 우리 가족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다. 거절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이다. 누가, 어떤 행동이, 가족의 가치를 훼손시키는지를 분명히 하는 일이다.
설이 되면 집집마다 다른 풍경이 펼쳐지고, 사람마다 다른 시간을 보내게 될 터이다. 이번 설에는 우리 가족은 어떤 ‘사회’인지를 유심히 살펴보자.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고, 일을 나누는지. 우리들 각자도 그중 한 구성원이다. 자, 이제 명절이 지나면 친구들과 나눌 이야기가 많아질 것이다.
문미정 ㅣ 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 강사

‘거절은 새로운 관계로의 초대’라고 했다. 수빈이가 슬금슬금 삼촌을 피하면서 마음속으로 불안을 키우거나 자신을 미워하는 대신, 거절하기를 선택함으로써 정말로 우리 가족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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