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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나흘간의 슬로 리딩에 동행한 ‘달과 6펜스’

등록 2020-04-13 18:24수정 2020-04-14 02:38

연재ㅣ임성미의 ‘다시 고전으로’

차로 다닐 때는 안 보이던 것들이 걷기를 할 때 비로소 보이듯이, 천천히 느리게 읽으면 작가의 호흡이 더 가깝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오래전의 언어로 만들어진 고전과 슬로 리딩은 잘 어울리는 짝이라고 할 수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차로 다닐 때는 안 보이던 것들이 걷기를 할 때 비로소 보이듯이, 천천히 느리게 읽으면 작가의 호흡이 더 가깝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오래전의 언어로 만들어진 고전과 슬로 리딩은 잘 어울리는 짝이라고 할 수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중2 학생 아홉 명과 ‘슬로 리딩 고전 읽기’라는 주제로 나흘간 하루 두 시간씩 독서 시간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책은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 이 책을 선택한 것은 드라마에 익숙한 요즘 청소년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다고 여겨서입니다. 실제로 몸은 “소설이란 재미를 위한 것”이라는 말을 했던 사람으로, 간결하고 쉬운 문체로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풀어내 대중에게 인기가 많은 작가였지요.

널리 알려졌듯이 <달과 6펜스>는 두 아이의 아버지이자 증권 중개인으로 살아가던 중년의 남자 스트릭랜드가 어느 날 갑자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되겠다고 가정을 박차고 나가면서 시작됩니다. 화가 폴 고갱을 모델로 한 소설이지만 고갱의 삶과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일단 우리는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져 들어오는 교실에서 1시간 동안 조용히 묵독을 했습니다. 천천히 읽다가 문득 눈길이 머무는 문장을 만나면 밑줄을 긋고 그 문장을 옮겨보기로 했습니다. 드디어 묵독이 끝나고 나눔 시간.

“화가가 되는 것이 가정을 돌보는 일보다 더 절박해?” “15년 동안 가정에 헌신했으면 이제 자신을 위해 살아도 되지 않을까?” “아내도 처음엔 힘들었지만, 이별을 통해 자기발견을 한 게 아닌가?”와 같은 질문과 대답이 오갔는데, 특히 주인공 스트릭랜드의 행동에 대한 찬반 공방이 가장 많았습니다. 남편의 배신에 괴로워하는 아내의 심정에 공감하는 학생도 있었지만, 자녀의 처지에서 주인공을 바라보기도 했습니다. 남편을 버리고 스트릭랜드를 사랑하다 버림받자 죽음을 선택한 블란치와, 그런 블란치를 끝까지 사랑하는 스트로브에 대한 평가도 엇갈렸습니다. “절박하게 원하는, 영혼의 깊숙한 곳에 창조적 본능 같은 게 나에게도 있는가?” 다소 어렵고 추상적인 질문을 던져보니, 아직 절실하게 바라는 것은 별로 없지만, 이번 소설을 읽으면서 예술가들의 마음과 예술이 추구하는 것에 대해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고 답하는 학생도 적지 않았습니다.

나흘간의 슬로 리딩 시간을 마치고 소감을 나누는 시간. 의외의 대답에 놀랐습니다. “혼자서 죽 읽는 것보다 중간에 잠시 멈추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들으며 읽으니까 내용이 더 재미있어요.” “폴 고갱의 그림에 대해 관심이 생겼어요.” 그런데 의외로 “정말 단순히 책만 읽었는데도 기분이 좋았어요.” 그냥 조용히 읽기만 했는데도 마음이 편안해지고 쉬는 기분이 들었다는 것이지요. 아이들에게는 슬로 리딩 시간이 일종의 휴식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습니다. 바쁘고 지친 학생들에게 학교에 ‘슬로 리딩 룸’을 만들어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차로 다닐 때는 안 보이던 것들이 걷기를 할 때 비로소 보이듯이 천천히 느리게 읽으면 작가의 호흡이 더 가깝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오래전의 언어로 만들어진 고전과 슬로 리딩은 잘 어울리는 짝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임성미 ㅣ 독서교육전문가, <담요와 책만 있다면>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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