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교육

서열사회, 희망은 아이들

등록 2020-08-29 09:46수정 2020-08-29 09:55

[토요판] 김선희의 학교 공감일기
⑭교사의 상처와 보람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요즘 아이들은 모둠 활동을 싫어해요. 철저하게 개인적인 능력을 평가받고 싶어 하죠.”

꽤 오랜 기간 중학교에서 근무하다가 십수년 만에 고등학교로 전입한 첫 해, 고3 학생들의 모둠별 협력 수업을 준비하는 내게 건넨 동료 교사의 말이다. 그럼에도 학교 안팎으로 입시 몰입 공부에 시달리는 수험생들이야말로 수업이라는 안전한 환경에서 동료와 활발하게 상호작용하는 기회가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많은 대화와 일부의 타협을 통해 계획한 대로 추진해갔다.

실기 수업에서 배운 기타연주를 이용해 모둠별 합주를 하는 활동에서 연화(가명)네 모둠은 꽤 어려운 곡을 선택했다. 연주할 수 있는 아이는 음악적인 이해가 빠르고 기본기도 잘 갖춘 연화뿐이었다. 연습 기간 동안 친구들의 연주를 자상하게 돕는 연화의 모습은 그 어떤 교사보다 훌륭했다. 실력이 미흡한 친구도 포기하지 않고 기타연주 대신 노래를 부르며 함께할 수 있도록 격려했다. 그 모습에 존경심마저 느꼈다. 결국 호흡을 맞추어 학급 친구들의 기립박수 속에서 흥겹게 발표했다. 울컥, 눈물이 났다. ‘아이들은 함께할 수 있는 판을 깔아주면 이토록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는데, 어른들이 만든 학교의 시스템은 과연 어떨까? 뒤처지는 아이의 손을 끝까지 잡아주고 있는 걸까?’ 나쁜 판을 깔아놓은 세상을 탓하기보다 ‘나눌 줄 모르는 요즘 아이들’이라는 어른들의 성급한 판단이 아쉽게 느껴졌다.

수업을 마치고 주변 동료들에게 연화로 인해 느낀 점을 말해주었다. 다른 교사들도 자신의 수업을 통해 본 연화의 인품을 앞다퉈 칭찬했다. 그때 한 교사가 나섰다. “그럼 뭐해요? 그래 봤자 성적이 5등급인걸.” 순간 말문이 막혔다. 아이의 성적을 한 존재의 값어치로 여기는 것 같아 화가 치밀었다. 한편으로는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궁금한 마음도 들었다. “혹시 연화의 내신 성적이 5등급이라서, 좋은 면이 있어도 별 가치가 없다는 생각이 드나요?” “우리 학교만 해도 인간미 넘치고 건강한 공동체 의식을 지닌 아이들이 얼마나 많아요. 그런데 대학에서 알아주질 않잖아요. 인기 대학은 1, 2등급이 아니면 원서조차 들여다보지 않을 테니 다 무슨 소용이에요?”

“아, 대학에서 아이들의 인성을 제대로 봐주지 않으니 속상한 거군요.” “네, 매년 반복해서 그런 경험을 하니 무력감이 들어요.” “그렇다면 우리가 저마다 힘을 모아 ‘이 아이가 얼마나 훌륭한지’ 기록해주면 어떨까요?” “몇 년을 그렇게 노력해봤지만 밤새워 쓴 몇 장의 학생생활기록보다 숫자 하나로 매겨진 등급이 우선이더라고요. 차라리 하나라도 더 외우게 하고 시험문제로 철저하게 변별해서 인기 대학에 보내면 당장 주변의 평가라도 잘 받죠. 교사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려 들면 이 모순된 환경에서 무슨 보람으로 버틸 수 있겠어요.” “대학 입시 성과로만 학교와 교사의 자질을 평가하는 사회 풍토 속에서 바람직한 한 사람으로 성장하도록 이끌어주는 역할은 무시되고 있다고 느끼는군요. 그런데 우리가 기록한 내용을 사회가 어떻게 해석하든 그 아이 당사자에게 확인시킬 필요는 있을 것 같아요. 대학과 사회가 성적으로 줄 세워 자신의 존재를 알아주지 않을지라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지속적인 관계를 맺은 교사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는 한 아이의 인생에 큰 영향을 주리라 생각해요. 시스템이 나쁠수록 아이들에 대한 피드백에 온 정성을 실어보면 어떨까요. 그게 교사의 고유한 특권이자,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건강한 영향력 아니겠어요?”

세상이 온통 지뢰밭일지라도 여전히 희망은 교육에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잠시 안전한 울타리가 되어주면 서로의 존재 가치를 잊지 않고 나쁜 세상 속에서도 선한 힘을 발휘하는 아이들이 창창하게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교사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속보] 윤석열 쪽 증인 국정원 3차장 “선관위, 서버 점검 불응 안했다” 1.

[속보] 윤석열 쪽 증인 국정원 3차장 “선관위, 서버 점검 불응 안했다”

윤석열 아전인수…“재판관님도 그렇게 생각할 것 같은데요” 2.

윤석열 아전인수…“재판관님도 그렇게 생각할 것 같은데요”

공룡 물총 강도에 “계몽강도” “2분짜리 강도가 어디 있나” 3.

공룡 물총 강도에 “계몽강도” “2분짜리 강도가 어디 있나”

“우울증은 죄가 없다”…초등생 살해 교사, 죄는 죄인에게 있다 4.

“우울증은 죄가 없다”…초등생 살해 교사, 죄는 죄인에게 있다

윤석열 “연설 때 야당 박수 한번 안 치더라”…계엄 이유 강변 5.

윤석열 “연설 때 야당 박수 한번 안 치더라”…계엄 이유 강변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