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코 SNS에 올린 글, 동영상, 옛 사진, 그리고 나의 개인정보가 담긴 과거 링크 기록까지 누구나 찾아낼 수 있다면? 정보 과잉의 시대, 검색하면 다 나오는 인터넷 세상에서 ‘잊혀질 권리’를 외치는 목소리가 늘고 있다. 산타크루즈컴퍼니 김호진 대표가 말하는 잊혀질 권리란 행복이다. 망각 속에서 살고 싶어 하는 권리가 바로 개인의 행복인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잊혀질 권리를 보장하고, 사이버 공간에서의 나쁜 기억을 지워주는 사람, 국내 1호 ‘디지털장의사’로 활동하고 있는 그를 만났다.
디지털장의사는 무슨 일을 하나요?
온라인상에 떠돌아다니는 ‘불편한 기록’을 삭제합니다. 과거에는 정보가 신문, TV와 같은 전통매체를 통해 전파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곤 했어요. 하지만 지금의 인터넷에는 모든 기록이 존재해요. 심지어는 20년 전 기록도 찾아낼 수 있죠. 디지털장의사는 과거의 기록 때문에 현실에서 괴로움을 느끼는 개인, 기업, 단체의 니즈에 의해서 만들어진 직종입니다. 그들의 불편한 온라인 게시물을 삭제해주고, 더 나아가서 ‘온라인 평판관리 매니지먼트’를 하고 있습니다.
국내 최초 ‘디지털세탁소’, 디지털기록 삭제 업체를 창업한 계기가 궁금해요.
저는 원래 광고나 영화에 적합한 모델 혹은 배우를 캐스팅하는 모델 에이전시를 운영했어요. 그런데 2008년, 한 시리얼 광고에 저희가 출연시킨 아동 모델에게 300개가 넘는 악성 댓글이 쏟아진 사건이 시초가 됐어요. 인터넷에는 순식간에 안티 카페가 생겨났고, 심지어 모델의 실명과 학교 이름이 그대로 광고에 노출되는 바람에 ‘너희 학교로 찾아가서 돌을 던지겠다’와 같은 협박까지 당했죠.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어린 학생이 정신과 치료를 받는 것까지 보면서 일말의 책임감이 들었어요. ‘어떻게 하면 아이가 예전과 같은 삶으로 복귀할 수 있을까?’ 도울 방법을 고민하다가 “온라인 게시물을 모두 삭제해보자!” 결심한 거죠. 피해자와 관련된 게시물을 전부 찾아서 사이트 관리자에게 삭제 조치를 요청했더니 일주일 만에 싹 사라졌어요. 이걸 계기로 ‘디지털장의사’ 일의 필요성을 느끼고 2013년에 특허를 출원하면서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죠.
주로 어떤 사람들의 어떤 기록을 지워주나요?
일반 사람들은 우연히 알게 된 몰카(불법촬영), 과거 연인과 찍었던 리벤지 포르노(보복성 포르노) 동영상 말고도 기타 ‘흑역사’가 담긴 게시물들을 삭제해달라고 합니다. 취업이나 승진, 결혼과 같은 통과의례를 앞둔 사람들로부터 의뢰가 많이 와요. 기업에서는 경쟁사에서 올린 잘못된 정보와 비방 글, ‘블랙 컨슈머’들의 부정 게시물이나 허위 사실에 근거한 게시물에 대해서 의뢰를 하고요. 연예인 같은 경우에는 아무래도 악성 댓글이나 타인이 몰래 촬영한 사생활 사진을 지워달라고 하죠. 의뢰인들을 보면 연령대별로 10대, 20대, 30대, 40대 순으로 10대가 가장 많아요.
대부분의 의뢰인들이 10대라니, 몰랐던 사실이네요. 실제로 청소년 피해 사례를 많이 접했나요?
성적인 호기심이 왕성한 사춘기 청소년들이 겪는 피해가 심각하죠. 화상채팅을 통해 일명 ‘몸캠’을 찍거나 이성친구와 성관계 동영상을 촬영했는데 전교생에게 퍼지는 경우가 있어요. 피해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 못 하고 끙끙 앓다가 결국 인생을 달리하는 청소년들이 생각 외로 많아요. 요즘엔 ‘톡 스폰’ 피해로 의뢰해오는 경우가 있는데요. 이는 ‘카카오톡’ 메신저를 통해 의도적으로 접근한 다음 문화상품권이나 기프티콘으로 유인해서 청소년에게 노출 사진을 받아내고, 이를 채팅사이트나 도박사이트에 파는 것을 말해요. 피해자의 신상을 알아내고 나체 사진을 유포한다고 협박해 더 심한 요구를 하는 악질적인 수법이죠.
최근 ‘텔레그램 N번방’ 사건과 유사하군요. 특히 ‘N번방’ 청소년 피해자에게는 무료로 동영상 삭제를 도와주신다고요.
‘N번방’ 이슈가 수면 위로 떠오르고 가해자에게 연락이 왔어요. “건당 1억을 줄 테니 신상정보를 삭제해달라”고 하더군요. 적은 돈이 아니라 살짝 고민도 했지만 이내 모두 거절했습니다. 저는 모든 이들에게는 잊혀질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이 경우는 예외였어요. 선과 악, 정의로움에 대한 기준은 명확해야 하기 때문이었죠. 그리고 청소년 피해자들의 경우 무상으로 동영상을 삭제해주겠다는 공지사항을 올렸어요. 사실 저희는 ‘N번방’ 사건이 있기 전부터 청소년에 한해 무료로 ‘잊혀질 권리’ 서비스를 지원하고 있어요. 도움을 청할 길이 없어 절박한 심정으로 찾아온 아이들에게 어떻게 돈을 받을 수 있겠어요.
혹시 삭제가 불가능한 기록도 있나요?
“모두 삭제가 가능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안타깝게도 삭제 불가능한 것도 있습니다. 기사의 경우 언론사마다 게시물 삭제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똑같은 기사라도 기록이 남아 있는 언론사가 있어요. 삭제 업무는 보통 사이트 운영자에게 직접 요청해서 진행하는데요, 외국의 불법사이트, 특히 관리자가 존재하지 않는 해적사이트에 올라온 게시물은 삭제를 할 수 없어요. 해외 플랫폼은 삭제가 까다로운 편이에요. 실제로 트위터에서는 ‘게시자에게 삭제를 요청하라’, 페이스북은 ‘게시자를 차단하라’는 답변이 옵니다. 그리고 텔레그램과 같은 외국계 회사는 기록 삭제에 대한 협조가 까다로워서 기술적으로 삭제가 불가능하다는 한계가 있어요.
국내 1호 디지털장의사 김호진 대표는 "디지털 성범죄 피해를 당했을 때 망설이지 말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달라. 현실적인 해결책을 찾아줄 것이다"고 말했다. 사진 손홍주
국내 1호 디지털장의사로 일하면서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 많을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오지랖에서 시작된 일이었잖아요. 어느 날은 디지털 흔적을 지우다가 범인을 잡아준 적도 있어요. 랜덤채팅을 통해 만남을 갖고, 불법촬영을 해서 그 사진을 몰래 피해자 SNS 계정에 올리는 상습범이었죠. 알고 보니 피해 여성이 세 명 정도 더 있었어요. 경찰을 대동해서 현장에서 체포했어요. 삭제 의뢰 임무를 완수하고 나면 청소년들이 감사 인사를 보내와요. 아마 그들이 성인이 되면 인생에서 큰 도움을 받았다고 느낄 거예요. 지금 제가 하는 일이 타인의 삶을 긍정으로 바꾸고, 희망을 주는 비즈니스라는 생각이 들 때 뿌듯해요.
4차 산업혁명 시대에서 유망한 신(新)직업으로 디지털장의사가 주목받고 있는데, 이 직업이 우리 사회에서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미래에는 개인과 기업의 이미지나 브랜드 관리를 넘어서, 국가적인 평판 관리에도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우리나라의 상품이나 문화 콘텐츠를 수출하다 보면 한류에 반대하는 ‘반한류’ 세력도 생겨나요. 하지만 온라인 평판관리를 통해 이들의 악의적인 게시물이나 허위 사실의 유포를 막는다면, 국가 브랜드를 훨씬 상승시킬 수 있어요. 또, 디지털장의사 업무의 특성상 질 좋은 고용이 늘어난다는 장점이 있어요. 부정 게시물을 삭제하고, 모니터링을 하는 전문가로 장애인이나 경력단절여성, 정년퇴임자에게도 충분한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죠.
디지털장의사를 꿈꾸는 청소년이 갖춰야 할 자질이나 적성이 있을까요?
디지털장의사는 무엇보다 분석력이 중요하거든요. 하루에도 100개가 넘는 게시물을 읽으며 삭제 여부를 판단하고, 말의 뉘앙스에 따라 비판인지 비방인지 판단을 내려야 해요. 그런 면에서 오히려 외향적인 사람보다는 조용히 앉아서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어울리겠네요. 그리고 여러 가지 사회 현상에 대한 평가를 스스로 연습을 해보는 것도 좋아요. 특히 ‘개인정보가 왜 중요한 건지’ 자기만의 뚜렷한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도움이 될 겁니다.
끝으로, 대표님께서 앞으로 바라는 점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디지털 기록을 말끔히 지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교육’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어요. 개인정보 보호에 대한 무지함, 또는 불법촬영 영상물 유포가 범죄라는 자각이 없어서 청소년들이 쉽게 실수를 저지르고 후회하는 것을 너무 많이 봤거든요. 학교에서 디지털 성폭력 교육과 개인정보와 관련된 윤리 교육을 어릴 때부터 꾸준히 실시하면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이 오지 않을까요?
■ 당신의 '잊혀질 권리'를 지켜드립니다
-국내 1호 디지털장의사가 말하는 '디지털 기록 삭제 프로세스'
1. 상담
‘산타크루즈컴퍼니’ 홈페이지나 대표전화 02-3446-8775를 통해 의뢰할 내용을 문의한다. 디지털 기록 삭제를 요청한 의뢰인과 상담을 통해 데이터 수집을 위한 검색어(키워드)를 정립한다. 이때 신상 정보를 온라인에 입력하고 나오는 검색어도 키워드에 포함된다.
2. 결제 및 담당자 배정
의뢰비는 의뢰인의 데이터양에 따라 결정된다. 일반인 기준 월 30만 원에서 월 200만 원까지 천차만별이다. 결제가 완료되면 데이터수집팀에서 담당자가 배정된다. 담당자의 수도 역시 데이터 건수에 따라 달라진다. 보통 1건당 주간조 1명과 야간조 2명이 투입된다.
3. 데이터 수집
빅데이터 프로그램의 추적 기술을 이용해 ‘정보의 바다’ 인터넷에서 데이터를 수집한다. 검색어 중에서 연관된 키워드가 있으면 연관어를 넣어서 다시 필터링해서 데이터를 찾는 식으로 여러 사이트에 퍼져 있는 삭제 대상을 수집한다.
4. 게시물 분류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수집한 이후에는 긍정/부정 게시물을 분류한다. 악성 내용이나 허위사실이 포함되었는지 등을 파악하여 의뢰인과 데이터 공유를 통해 삭제 요청 여부를 논의한다. 문맥이나 맥락을 고려해 데이터를 평가해야 하기 때문에 가장 많은 시간을 요하는 작업이다.
5. 삭제 요청
의뢰인에게 위임장을 받아 해당 포털에 디지털 기록 삭제 요청을 보낸다. 사이트마다 이용약관과 개인정보 취급방침이 달라 이를 잘 분석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해당 게시글이 어떤 법·약관 조항에 위배되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6. 모니터링
삭제 업무가 완료된 뒤에도 1년 정도의 모니터링 기간을 둘 수 있다. 삭제 대상 게시물이 올라오면 재차 찾은 후 반복해서 삭제해나간다. 데이터가 ‘0건’이 되도록 일종의 사후관리를 하는 것이다. 산타크루즈컴퍼니는 모니터링 비용을 기존 월 의뢰비의 20%만 받고 있다.
글 이은주 • 사진 손홍주, 게티이미지뱅크
이은주 MODU매거진 기자 silver@modu1318.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