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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아이가 자라는 데 필요한 길을 내는 일

등록 2020-11-07 11:50수정 2020-11-07 11:52

[토요판] 김선희의 학교 공감일기
연결과 소통
장원(가명)이의 이야기 세번째, 마무리다. 아이가 여러 관계 속에서 타인의 영역을 지키면서도 자신의 욕구를 적절히 조화하여 절충하는 연습을 하면서 점차 밝고 안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때까지 담임교사인 나는 장원이에 대해 각별히 너그러운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제 내 마음도 정확하게 말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모둠별 아이이어 회의가 있던 음악 시간, 열띤 토의를 하고 있던 모둠원들의 곁을 떠난 장원이가 음악실 뒤에 걸린 큰 거울 앞으로 걸어가더니 태연히 옷맵시를 매만지며 머물렀다. 흘낏 눈총을 주는 모둠장의 태도를 보니 그의 행동이 불만스럽지만 굳이 지적하는 건 내키지 않는 듯했다. 나는 장원이 곁에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

“장원아, 지금 모둠 활동 중인데 여기 나와 있게 된 이유가 있을까?” “오늘 옷차림이 영 마음에 안 들어서요. 학교 마치고 애들 만나러 갈 건데, 짜증 나서 수업에 집중이 안돼요.” “아. 그렇구나. 그런데 수업 중에 모둠 친구들과 더불어 지도교사인 나의 양해를 구하지 않고 자리를 떠나니 보기 좋지 않네. 모둠 친구들의 사기도 떨어질 수 있고. 그만 자리로 돌아가줄래?” “모둠장이 의견 하나씩 내라고 해서 제 의견 냈으니 나와 있어도 되는 거 아니에요?” “아, 너는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자기 의견을 내는 것도 필요하지만 다른 사람의 의견도 경청해서 조율해 나가는 것이 더 중요한 과정일 것 같은데, 네 생각은 어때?” “그런 건 모둠장이 하는 거 아니에요? 전 이 주제에 관심이 없단 말이에요. 수행평가 잘 못 받아도 상관없고요. 하라는 거 했으면 그만이지, 관심도 없는 일에 왜 끝까지 참여해야 해요?” 거듭 의문을 표하는 내게 불만스러운지 점점 장원이의 표정과 말투가 거칠어졌다. “음, 이 주제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구나. 그럼에도 수업 시간에 지켜야 할 질서가 있는 거잖아? 모둠원 친구 간에 지켜야 할 예의도 있고.” “모둠 아이들 모두 저한테 아무 불만 없는데 선생님이 왜 그러세요?” 나는 아이의 눈을 정확하게 보며 말했다. “장원아, 나는 이 수업을 주관하는 지도교사잖아. 수업의 질서 유지를 위해 꼭 필요한 요구를 하고 있는데 내 입장은 무시하고 네 생각만 말하니 적잖이 서운한 마음이 든다. 우리 모두 다른 이에게 존중받고 싶어 하는 존재잖아. 그간 너와의 관계에서 아무리 바빠도 네 사정을 먼저 묻고 집중했던 것은 너를 각별히 좋아하고 존중하기 때문이야. 나도 너에게 그런 존재이고 싶어.”

시종 귀찮다는 듯 시선을 산만하게 두었던 아이가 잠시 내 눈을 응시한 채 멈칫했다. 그러더니 작은 목소리로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며 자리로 돌아갔다. 그 이후로 이야기 나눌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내 눈에 정확하게 시선을 맞추고 있는 장원이의 눈빛을 느꼈다. 이전까지는 긴 대화가 쉽지 않았지만 그날 이후 꽤 긴 대화에도 눈빛이 차분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다른 교사들이나 친구들 관계에서도 같은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다소 번잡했던 우리 반이 어느새 모두에게 참 괜찮은 학급이 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장원이의 담임교사였던 한 해, 주위 사람들과 끊임없이 불화하는 장원이와 부모, 친구, 교사들 사이의 교량이 되어주느라 수도 없이 그들의 마음을 묻고 듣고 나눠야 했다. 그것은 ‘한 아이가 자라는 데 필요한 한 마을의 마음길’을 닦아가는 여정이었다. 그 과정에서 자주 ‘너 정말 멋져!’라는 찬사를 날릴 수밖에 없었던 각별히 소중한 아이, 장원이와의 1년, 매일 일기를 썼다면 책이 한 권 넘게 나왔을 만한 아름다운 영감이 넘치는 순간들이었다.

가장 힘든 아이를 돌보는 일은 모두를 더 살기 좋게 돌보는 일이기도 했다. 개별적으로야 친하든 안 친하든 서로가 뿜어내는 마음의 공기 속에서 공존하고 있는 존재들이니까. 한 사회에 속한 모두가 괜찮아지는 지름길은 부적응하는 이의 목소리에 집중하는 데 있음을 확신한다.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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