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교육

목소리 좀 내봐, 응?

등록 2021-03-06 10:29수정 2021-03-06 10:34

[토요판] 김선희의 학교 공감일기
공교육의 본질을 회복하려면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김선희. 김선희!” “…….”

초등학교 2학년 때 빈 교실에 남은 나를 향한 선생님의 호명에 응답하지 못했다. 나는 극빈 가정의 5남매 중 둘째 딸로 자랐고, 잔뜩 주눅이 들어 누구와도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채 함구증 같은 학교생활을 하고 있었다. 종업식 날 담임 선생님은 모든 아이를 하교시킨 후 나를 남겼다. 대답 없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선생님은 말했다. “김선희, ‘네’라고 한번만 말해봐. 선생님이 1년 동안 가르쳤는데, 네 목소리 한번은 들어봐야 할 것 아니야. 목소리 좀 내봐. 응?” 선생님의 간절한 눈빛에 떠밀려 가까스로 “네” 하고 답했다. 순간 교실 속에서 존재하는 나 자신을 인식할 수 있었다. ‘아, 내가 여기에 있구나.’ 교실이라는 커다란 세상에 비로소 나라는 존재가 하나의 점으로 그려 넣어진 최초의 확인이었다. “말할 줄 아네. 3학년 되거든 선생님과 친구들이 부를 때 대답 크게 하고 발표도 해봐. 네가 할 수 있다는 거 다 알고 있어.” “네.” “그래, 앞으로 잘 지내.” 선생님은 교실 앞문을 열고 나를 배웅했다. 2부제에 한 학급 70명이 넘는 당시의 열악한 환경에서 한 아이를 따로 바라보는 각별한 기회를 만드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 보답하듯 3학년에 진급한 나는 차차 내 목소리를 사용하며 느리게나마 다른 친구와 연결될 수 있었다. 잘나고 힘 있는 아이들에게 가려진 위축되고 남루한 한 존재의 소중함을 인식한 선생님의 고귀한 마음은 지금껏 내 기억 속에 뚜렷이 남아 교실 한편에 있는 듯 없는 듯 소리 없이 지내는 소외된 아이들의 마음을 비추는 등불이 되고 있다.

정신건강의학 전문의 정혜신은 ‘커다란 슬픔에 빠진 한 이웃의 에스엔에스(SNS) 글에 압도되어 아무런 반응을 할 수 없었다’는 누군가의 고백에 ‘댓글을 달기 힘들거든 점 하나라도 찍으라’고 권했다. 그로써 ‘그는 결코 혼자가 아님’을 인식할 수 있으며, 다른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극한 고통으로 인한 고립감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마음에 잠시 눈길을 주는 행동은 나조차도 절뚝거리는 삶 속에서 내 앞에 놓인 한 존재가 다른 한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한다. 그것이 바로 각자도생의 척박한 사회에서 불안하고 힘없는 존재들이 세상과 융화하기 위해 서로에게 건넬 수 있는 가장 안전한 사랑의 실천인 것이다.

나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공교육의 이념과 기회균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고 있는 산증인이다. 빈민가의 알코올중독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어른, 욕설하며 악다구니 쓰는 어른, 무기력에 빠진 어른, 맞고 때리는 아귀다툼 같은 일상을 살아가는 어른과 전혀 다른 어른을 지속적으로 만날 수 있는 곳은 오로지 학교뿐이었다. 교사의 단정하고 깔끔한 모습을 통해 막연하기만 했던 괜찮은 인간상을 구체적으로 바라며 꿈을 키운 것이다. 학대와 방임의 지옥 같은 환경의 나조차 배움을 놓지 않고 더 나은 삶을 추구하여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건강한 한 어른과 연결되어 있게 한 학교라는 안전한 울타리에 속한 덕분이었다.

과거와 달리 오늘날은 절대적 빈곤을 겪는 학생들이 대폭 감소했다. 그러나 상대적 박탈감이나 마음의 허기로 힘든 삶을 이어가는 아이들은 오히려 더 많다. 꽤 많은 아이가 과열 경쟁교육으로 인한 과로와 마음의 상처로 시들시들 말라가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아이들은 교사를 절대적으로 우러르고 따른다. 교사가 품은 마음과 생각은 아이들을 통해 우리네의 미래 환경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교사는 한 사회를 새롭게 디자인할 수 있는 매우 영향력 있는 존재다. 자율성을 보장받는 교사의 높은 자존감은 아이들의 건강한 시민의식으로 승계된다. 경쟁교육으로 인한 입시관리 중심 학교체제에서 행정관리 기능이 더 강조되는 가운데 위축된 교사 본연의 정체성 회복이 시급하다. 참스승, 백기완 선생님이 우리 곁을 떠났다.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세상의 가치가 더 희미해지기 전에 교육 불안을 부추기는 경쟁교육을 멈추고 공교육 본질의 건강성을 회복하기 바란다. 이는 머지않아 시대적 약자가 될 우리 세대의 안정된 미래를 가꾸는 일이기도 하다.

교사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1.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2.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3.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4.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5.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