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년만에 서울을 다시 찾은 브루스 테일러(맨오른쪽)가 서울 행촌동 '딜쿠샤'앞에 가족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금광 개발로 한국 찾은 할아버지
3·1운동 전세계에 타전한 아버지
66년만에 고향 온 아들 명예시민
3·1운동 전세계에 타전한 아버지
66년만에 고향 온 아들 명예시민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 고향이라고 생 텍쥐베리는 말했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미국인 브루스 테일러(87)에게도 고향은 서울이다.
브루스 테일러가 고향을 찾아 지난달 말 서울을 방문했다. 1940년 미국의 대학 입학을 위해 서울을 떠난 지 66년 만이다. 그는 3·1 운동 전야인 1919년 2월28일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서울에서 보냈다. 서울 양화진의 외국인묘지에 묻혀있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이어 3대가 한국과 깊은 인연을 맺어온 것이다.
테일러 가문이 한국과 맺은 인연은 금광 기사였던 할아버지 조지 알렉산더 테일러가 평안북도 운산의 금광 개발을 위해 1896년 한국으로 오면서부터 시작됐다. 1908년 세상을 뜬 할아버지는 당시 외국인 선교사·의사 등의 유해를 모신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금광 엔지니어이자 UPI 통신사 특파원이었던 아버지 알버트 테일러는 한국의 3·1 운동 소식을 전세계에 타전한 인물이었다. 아버지는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3·1 독립선언문을 입수한 뒤 갓 태어난 아들 브루스의 침대 밑에 숨겨 두었다가 이를 뉴스로 내보냈다.
아버지 테일러는 아들 브루스를 낳은 지 4년 뒤인 1923년 종로구 행촌동에 손수 집을 짓고 ‘딜쿠샤’라고 이름붙였다. 딜쿠샤는 행복한 마음, 기쁨, 이상향을 뜻하는 힌두어다. 그러나 ‘딜쿠샤 생활’은 영원하지 못했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나면서 일본과 미국의 관계가 악화되자 테일러 일가는 1942년 5월 한국을 떠나야 했다.
일제에 의해 한국에서 추방된 뒤 미국에서 여생을 보내던 아버지는 1948년 심장병으로 세상을 뜨면서 ‘내가 사랑하는 땅 한국, 아버지의 묘소 옆에 나를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같은 해 남한 정부가 수립되고 난 뒤 아버지의 유언은 지켜졌다.
영국과 미국을 오가며 학교를 다녔던 아들 브루스는 미국에서 교사 생활을 하며 한번도 한국에 오지 못했다. 그러나 테일러 가문의 한국 사랑은 대를 이어 계속됐다. 어머니 메리 테일러가 그간의 서울 생활을 기록한 자서전 <체인 오브 앰버>를 펴낸 데 이어 손녀 제니퍼(브루스의 딸)는 이 책을 영화로 제작 중이다. 테일러 가족의 한국 사랑 이야기는 <한국방송>의 3·1절 특집 다큐멘터리 <아버지의 나라>로 방송될 예정이다.
다큐멘터리 촬영을 위해 서울을 방문한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변모한 서울의 모습도 놀라웠지만, 무엇보다 ‘딜쿠샤’란 초석이 또렷이 새겨 있는 고향집이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이 반가웠다. 서울시는 현재 딜쿠샤를 등록문화재로 추진하기 위해 절차를 밟고 있다.
브루스 테일러는 6일 서울시로부터 명예시민증을 받는다. 브루스는 시민증 수여식에서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던 서울 사진 17점을 시에 기증할 예정이다. 20년대 시청과 원구단, 동대문, 고종황제 장례식 행렬 등을 담은 사진이다. 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는 “장례식 장면 등을 근거리에서 촬영한 사진이 남아 있지 않아 매우 귀중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시는 앞으로 서울역사박물관 전시 등을 통해 이 사진들을 공개할 계획이다.
이유주현 기자 edigna@hani.co.kr
이유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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