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기업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일본기업 쪽이 소멸시효 및 최근 있었던 ‘각하’ 판결을 소송 전략으로 앞세우고 있어 피해자들이 반발하고 있다. 피해자들은 일본기업을 대리하는 김앤장이 과거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강제동원 소송을 지연시키려 한 의혹의 한쪽 당사자였다는 점을 지목하며 “소멸시효 주장은 파렴치하다”고 주장한다.
앞서 지난 21일 서울중앙지법 민사68단독 박진수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강제동원 피해자 손해배상 소송에서 피해자와 피고 일본제철은 소멸시효가 완성됐는지를 두고 맞섰다. 민법은 피해자가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를 알게 된 날로부터 3년이 지나면 권리의 시효가 소멸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피해자들은 2005년 제기된 ‘일본제철 손해배상청구소송’ 재상고심이자 확정판결이 나온 ‘2018년 10월3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전합) 판결을 소멸시효의 시작점이라고 보고 있다. 반면 일본제철은 전합 판결에 앞서 대법원이 피해자 승소 취지로 파기환송한 ‘2012년 5월24일’을 시작점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논리대로라면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은 2015년 5월에 소멸해, 이후 숱하게 제기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일본기업 상대 손해배상청구는 인정되지 않는다.
일본제철의 이런 논리에 대해 피해자 쪽은 “파렴치하다”는 반응을 내놓고 있다. 일본제철을 대리하는 김앤장이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와 공모해 강제동원 소송을 지연시킨 의혹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검찰의 ‘사법농단’ 수사 결과, 양 전 대법원장과 한상호 김앤장 변호사가 따로 만나 대법원에 올라온 강제동원 피해자 재상고심 사건을 전합에 회부해 ‘전범기업의 피해자 배상책임을 인정한다’고 판결한 기존의 대법원 판결을 뒤집자는 ‘재판거래’를 논의한 혐의가 드러난 바 있다.
피해자 대리인인 이상희 변호사(법무법인 지향)는 27일 “피고 대리인 김앤장과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재판 지연을 공모한 당사자인데, 피고가 (김앤장을 내세워) 2012년을 소멸시효 기준이라고 주장하는 건 신의칙에 반한다”라며 “재판거래 당사자인 양 전 대법원장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기소된 상태에서 저런 논리를 펴는 건 파렴치하다”고 주장했다.
이 밖에도 일본기업들은 최근 서울중앙지법 민사34부(재판장 김양호)가 강제동원 피해자 85명이 일본제철 등 16곳 기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각하’한 판결문도 소송 자료로 적극 활용하고 있다. 지난 18일 서울중앙지법 민사94단독 박세영 판사 심리로 열린 재판에서 미쓰비시중공업 쪽이 해당 판결문을 참고자료로 제출한 데 이어, 지난 18일 일본제철도 다른 재판에서 같은 판결문을 참고자료로 제출했다. 해당 판결에 대한 상고심 결론이 나올 때까지 재판을 연기해야 한다는 취지로, 한시가 급한 고령의 피해자들을 압박하는 전략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신민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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