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통일 충북동지회 소속 회원이 2019년 청주 시내에서 F-35A(스텔스 전투기) 도입을 반대하는 1인시위를 하고 있다. 블로그 사진 갈무리
2016년 ‘피시(PC)방 간첩사건’ 이후 ‘간첩사건’이 5년 만에 불거졌다. 국가정보원과 경찰은 충북 청주지역에서 활동하던 활동가 4명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현재 수사 중이다. 4명 중 3명이 구속됐고, 정치권과 언론은 이들을 ‘청주 간첩단’으로 부르고 있다. 국가정보원·검찰·경찰 등은 이들이 “해외에서 북한 공작원과 접촉한 뒤 국내로 들어와 북한의 지령을 받고 간첩 활동을 했다”고 주장하지만, 당사자들은 “실체 없는 공안몰이”라고 반발한다.
정작 이번 사건에서 눈길이 쏠리는 건 지역 시민사회의 반응이다. 충북 지역 시민사회나 노동단체에서는 간첩 혐의를 받는 이들 4명을 두고 “평소 이해할 수 없는 행보를 보인 인사들”이라고 차갑게 반응했다. 이들이 ‘간첩’ 혐의를 받고 있긴 해도, 실제 이들이 ‘간첩 활동’을 했는지에 관해서는 수사당국과 지역사회의 시각 차이가 크다. 이들은 시민사회 내부에서도 ‘고립’된 처지였고, 외부로 드러난 그 어떤 유의미한 활동도 없었기 때문이다.
■ 수사당국 “해외에서 지령 전달받아”
간첩 혐의를 받는 인사들은 ‘자주통일 충북동지회’(동지회) 소속 박아무개(57)씨, 청주지역 소규모 언론사 대표 손아무개(47)씨, 한 협동조합의 이사 직함을 갖고 있는 박아무개(50)씨와 윤아무개(50)씨 등 4명이다. 목적수행(4조), 금품수수(5조), 잠입·탈출(6조), 찬양·고무(7조), 회합·통신(8조) 등 다수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는다.
10일 이들의 구속영장청구서를 보면, 검찰은 박씨가 국내에서 북한 공작기관에 포섭되어 북한을 추종하는 모임을 가져오다 2017년 5월 21일 중국 북경에서 북한 문화교류국 소속 공작원 조아무개(52)씨를 만나며 활동을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박씨가 중국에서 북한 공작원과 20분여 동안 택시를 타고 이동하면서 남한의 정세에 관한 대화를 나누고 한국에 돌아온 뒤 북한의 지령을 받아 3개월 뒤 동지회를 설립했다는 게 청구서의 내용이다.
박씨는 2017년 8월 동지회 출범과 함께 강령과 규약을 만들었는데 그 내용이 북한 노동당 규약(2016년 개정판)과 유사한 대목이 있다는 점을 들어 수사당국은 이들이 북한 정권을 추종하는 조직을 구성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검찰은 또 박씨가 북경을 다녀온 이듬해 4월께 윤 이사가 캄보디아로 출국해 프놈펜 시내에서 북한 공작원 조씨와 이아무개(38)씨를 만나 사상검열을 받고 지령을 전달받았다고 주장한다.
국정원과 경찰은 지난 5월 말 박씨 등 피의자 4명의 자택을 압수수색 했는데 이때 확보한 윤 이사의 이동식저장장치(USB)에서 북한으로부터 받은 구체적인 지령을 확인했다고 주장한다. 이 저장장치에는 최근 4년 동안 문화교류국과 박씨 등이 주고받은 84건의 ‘지령문’과 ‘보고문’이 담겨있다고 한다. 수사당국은 저장된 파일을 분석한 결과 ‘F-35A(스텔스 전투기)가 도입되니 주민들과 반대 운동을 전개하라’는 내용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박씨 등은 실제로 2019년 8월~2020년 2월 사이 청주 시내 일대에서 스텔스 전투기 도입을 반대하는 1인 시위를 진행했다.
수사당국의 주장을 종합하면, 북한 문화교류국이 지령문을 통해 “지역 노동자와 농민 틈에 들어가라”거나 “청년들을 받아들이라”는 내용의 지령을 내렸는데 4년 동안 이들이 주고받은 문건에서 포섭대상자로 거론되는 내국인은 60명에 이른다는 것이다. 포섭대상자로 거론된 일부는 수사당국 조사에서 “단순한 만남이었고 (4명과) 더는 교류하지 않았다”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수사당국은 또 구속영장에 이들이 북한 공작원으로부터 2만 달러의 활동자금을 지원받았다고 적시했다.
■ 당사자들 “구체적 증거가 하나도 없다”
하지만 당사자들은 이러한 혐의를 강하게 부인하고 있다. 구속영장이 기각돼 불구속 상태인 손씨는 “북한 공작원 이름을 들어봐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수사당국이) 공안몰이를 하는 것 같다”고 주장한다. 손씨는 수사 당국에서 지령을 내렸다고 주장하는 문화교류국 소속 북한 공작원이 실제 북한 사람이 맞는지 확인해달라는 공문을 국가인권위원회 등 국가기관에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박씨를 대리하는 변호인은 검찰이 구속영장에 적시한 사실이 논리적이지 않고, 객관적 증거도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검찰이 보여준 증거만으로는 북한 간첩단이라 인정할만한 객관적 증거가 부족하다. 예를 들어 통신이 성립하려면 북한에서 작성된 문서가 메일 또는 파일로 제3국에서 수신되야 하고, 또 북한으로 송신된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게 하나도 없다”고 꼬집었다. 그는 “택시에서 20분 동안 지령을 내렸다는 것도, 캄보디아 프놈펜의 평범한 식당에서 사상검열을 했다는 것도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된다”고 덧붙였다.
■ 지역사회 “4명 어디에도 끼지 못하는 이들인데…”
시민단체와 노동운동가들 사이에서는 이들이 지역 시민사회 어디에도 끼지 못하고 따돌림을 받던 처지였다는 말이 나온다. 무리한 주장과 부족한 친화력 탓에 누군가를 자기편으로 끌어오거나 설득할 역량이 없었다는 것이다. 충청지역 한 노동운동가는 “이들이 운영했다는 인터넷 언론 블로그를 보면, ‘친 북한’ 성향의 시민사회 인사들조차 이들을 ‘국정원 프락치’로 보는 경우도 있었다. 그동안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행보를 보여왔기 때문”이라고 전하며 “인지도가 있는 집단이 아니었을뿐더러, 어느 운동 진영에서도 이들과 엮이기를 꺼렸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들이 노동운동을 해왔다고 알려진 지난 20여년 동안 이들이 ‘조직화’하는 데 성공한 노동조합이나 단체는 전무하다고 지역 시민사회 인사들은 입을 모은다. 2016년에 이들 중 일부가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소속 금속노조에 조합원으로 가입하려 했지만 민주노총 역시 ‘조직력이 훼손될 수 있다’며 가입을 거부했다. 앞서 2003년에는 일부가 민주노총 여성연맹 위원장 직무대행을 사칭한 사실이 밝혀져 여성연맹에서 제명되기도 했다.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이들은 여러 단체와 활동하면서 분란을 일으키고 나간 사람들”이라며 “노동운동 진영에서 아무도 도와주는 이 없이 고립된 상태였다”고 말했다. 충청지역 시민운동가들을 변호해온 한 변호사도 “이들은 고집스러운 태도나 부족한 논리력 때문에 소위 사회운동을 하기엔 무리라는 평가가 많았다”고 전했다. 영장을 보면 박씨 등은 160만명을 포섭하여야 한다고 자기들끼리 다짐했다고 나오지만, 4년 동안 포섭된 사람이 없다는 게 지역사회 평가다.
이들이 주력해왔다고 알려진 ‘통일운동’ 역시 실체가 모호하다. 이들이 활동했던 ‘F35-A(전투기) 도입반대 청주시민대책위원회’는 통일부 등 정부부처 지원으로 북한에 묘목을 보내는 운동을 추진하겠다고 밝혀왔다. 그러나 10일 통일부는 “이들과 사업 협의를 하거나 사업 신청을 받은 사실이 없다”고 밝혔다. 이재호 천호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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