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와 가난으로 고독하게 숨져간 이들을 추모하는 `장애인과 가난한 이들의 합동사회장'이 17일 오후 서울 중구 무교동 서울파이낸스센터 앞에서 열려 참석자들이 헌화하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죽음, 한마디 못하고 죽어가는 죽음. 그들도 인간이 아닙니까. 그 죽음의 원인이 뭔지 이 사회에 알리기 위해 이곳에 섰습니다. 헌법에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고 나와 있습니다.”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는 17일 얼굴 없는 영정사진 앞에 국화를 놓아두고 이렇게 말했다. 얼굴 사진 대신 검은 실루엣이 담긴 영정사진은 장애와 가난으로 숨진 수많은 이들을 의미한다.
이날 빈곤사회연대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등으로 구성된 공동장례위원회(장례위)는 서울 중구 서울파이낸스센터 앞에서 ‘장애인과 가난한 이들의 합동 사회장’을 열었다. 장례위는 장애인과 빈곤층의 죽음을 추모하고, 이들의 생존을 보장하라고 촉구했다. 합동 사회장은 방역지침을 고려해 한 명씩 교대로 추모 발언을 이어가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합동 사회장을 연 것은 코로나19 장기화 속에 최근 가난 때문에 쓸쓸히 죽어간 이들이 우리 사회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장례위는 “장애인과 가난한 이들의 사망 소식이 연일 보도되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발굴과 모니터링이 부족하고 상담 및 프로그램 참여를 강제할 수 없음을 이야기 하지만 이들의 죽음은 발굴과 모니터링, 프로그램의 문제가 아니다”고 지적했다.
앞서 지난 8일 서울 노원구의 한 길가에 세워진 승용차에서는 50대 남성 ㄱ씨가 숨진 채 발견됐다. ㄱ씨는 최근 코로나19로 사우나 이용에 제한이 생기자 차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그는 기초생활보장 수급 신청을 한 뒤 심사 결과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달 29일에는 서울 서대문구에서 30대 남성 ㄴ씨가 거주지였던 다세대주택 옥탑방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뇌병변 장애인으로 기초생활수급자였던 그는 희귀질환을 앓고 있었다.
장례위는 이들을 비롯한 장애인과 빈곤층의 죽음이 “가난과 장애를 이유로 한 차별 때문”이라며 “한국사회 분배정책의 총체적인 실패로부터 발생한 사회적 죽음”이라고 강조했다. 이들은 “정부는 이러한 죽음이 발생할 때마다 제도 개선을 통해 빈곤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호언했지만 비극은 반복되고 있다”며 “제도 개선이 선언에 그치거나 땜질로 일관되어 왔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날 합동 사회장에 참여한 김정호 동자동사랑방 이사장은 “힘 있는 자들은 영결식을 호화스럽게 하는데, 우리 같은 사람이 죽으면 어느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마지막 가는 길까지 차이가 너무나 많이 난다”며 “약자들이 서로 돕고 서로 마음을 알아줄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최용기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회장은 “왜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가난하단 이유로 외롭게 쓸쓸히 죽어가야 하느냐”며 “옥탑방, 고시원, 쪽방촌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그 죽음을 바라보면서 나도 저렇게 죽어갈 수 있다는 불안과 공포도 들었다”고 말했다.
장례위는 정부와 대선 주자들에게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박승민 동자동사랑방 활동가는 “코로나19로 무더위쉼터가 줄어드는 등 복지 시스템이 방치돼 있다”며 “살기 위한 최소한의 도움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박경석 대표는 “정부는 부양의무자 기준 전면 폐지 등 약속을 지켜야 한다”며 “대선주자들도 이런 죽음에 대해 반성하고 자신들의 공약을 내놔야 한다”고 촉구했다.
장례위는 오는 19일 오전 11시까지 분향소를 운영할 계획이다. 장례위는 사회장을 마친 뒤 추모위원회 명단과 추모메시지, 불평등 해결을 위한 요구하는 서한 등을 청와대에 전달하겠다고 밝혔다.
김윤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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