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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태일 엄마’면서 ‘여성 운동가’였던 이소선…40년을 기억하다

등록 2021-09-02 17:42수정 2021-09-02 17:57

전태일기념관, <이소선의 기억과 기록> 발간
자식뻘 또 다른 전태일의 끼니 걱정하는 엄마
여러번 옥고 속에서도 현장으로 달려간 어머니
“여성운동가로서 온전히 자신의 삶 살아낸 분”
이한열 열사 상주를 맡아 발언하고 있는 이소선 여사. 전태일기념관 제공.
이한열 열사 상주를 맡아 발언하고 있는 이소선 여사. 전태일기념관 제공.

“엄마 꼭 제 뜻을 이루어 주세요.”

40년을 ‘엄마’로 살았던 고 이소선 여사는 첫째 아들 ‘태일’의 마지막 당부에 인생이 180도 달라졌다. 아들이 끝내 이루지 못한 과업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위해 ‘노동자의 어머니’로, ‘여성 운동가’로 노동·민주화 운동에 투신하게 된 것이다. 2011년 9월3일 눈을 감기 전까지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려 남은 40년을 치열한 운동가로 살았지만, 이를 지켜본 사람들은 <이소선의 기억과 기록>(기록집)에 “(이 여사는)태일 열사 또래들에게 밥 한 끼라도 더 챙겨주려는, 정이 넘치고 평범한 엄마”로서의 모습이 더 기억에 남는다고 입을 모았다. 전태일기념관은 이 여사 10주기를 맞아 이 여사의 생애와 업적을 입체적으로 재조명하고자 함께 활동한 13명과 가족의 목소리를 담아 지난 7월31일 기록집을 출간했다.

함께 운동하는 자식뻘 되는 노동자와 대학생을 ‘선생님’, ‘형님’으로 불렀던 이 여사였지만, 평소에는 자식 끼니를 걱정하는 ‘태일 엄마’였다. “첫인사가 ‘미스 유 밥은 먹었나?’ 였어요” (1975년 청계피복노조 부녀부장을 지낸 유정숙) “저희 부부가 어머니집 근처 창동으로 이사했는데 어머니는 종종 쌀은 있냐, 분유는 있냐고 물어보고 챙겨주셨어요. 그걸 보면 정말 아들을 사랑하는 보편적인 어머니셨어요” (박계현 전 전태일기념회업회 사무국장·1978년 청계피복노조 활동) “늘 싸움이 있기 전에 어머니가 대파를 듬성듬성 썰어 넣은 고깃국을 끓여 주셨어요. ‘엄청나게 힘들고 무서운 줄 아니까 그렇게 힘을 북돋워 주셨구나’하는 생각을 했어요.” (청계피복노조 조합원이었던 이숙희) “노조에 연소한 근로자들이 오면 진짜 사랑으로 안아요. 그냥 ‘조합원 왔어?’ 이런 식이 아니고 애틋한 사랑으로요”(전태일 열사 친구 최종인) 기록집에 나온 이 여사는 당시 가난에 허덕이며 열악한 노동 환경에 놓였던 또 다른 ‘전태일’을 아들과 딸처럼 보듬었다. 전태일 열사 분신 항거 직후 이 여사와 인연을 맺은 동지이자 ‘서울대 법대 학생’이었던 장기표씨는 기록집에서 “전태일이 노동자를 비롯한 하빠리 인생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생명까지 바치는 일을 하게 한 사람은 자기 엄마라고 생각한다. 이 여사는 전태일에게 남에 대한 배려와 사랑 그리고 정의롭게 살기를 바라는 교육을 끊임없이 해왔다”고 말했다.

평화시장 옥상에서 여성노동자들과 함께 선 이소선 여사. 전태일기념관 제공
평화시장 옥상에서 여성노동자들과 함께 선 이소선 여사. 전태일기념관 제공

노동의 ‘노’자도 몰라 태일에게 근로기준법을 배웠지만 이 여사는 투쟁 현장에서 ‘노동자의 어머니’로 현장을 진두지휘하고 동료들을 다독이고 희생자들의 슬픔을 어루만졌다. 청계 노조 합법성 쟁취 투쟁을 이어가며 이 여사와 운동을 함께한 이승숙씨는 “80년대 초중반에 분신항거가 엄청 많았다. 이 여사는 노동자의 어머니로서 항상 영안실에 가서 유족들과 함께 싸우고 유가족을 다독여주셨다”고 회상했다. 80∼90년대 투쟁·분신 현장을 지킨 이 여사였지만, 속으로는 피눈물을 삼켰다고 한다. 1971년 청계피복노조 부녀부장을 맡았던 정인숙씨는 “어머니가 (분신한) 분들을 보고 너무 고통스러워 했다. ‘제발 이제 죽는 것 좀 그만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며 “다시 태어나셔도 운동하실 거냐고 물어보니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생각해보면, 다시 하라고 하면 절대 못 한다’고 하셨다. 아들이 부탁한 ‘함께 싸워달라’는 말 때문에 쓰러지지 않고 계속 (운동하신 것 같다)”고 말했다.

청계피복노조 사무실 복구투쟁에 나선 이소선 여사(왼쪽 첫번째). 전태일기념관 제공.
청계피복노조 사무실 복구투쟁에 나선 이소선 여사(왼쪽 첫번째). 전태일기념관 제공.

1970년대부터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전태일 정신’을 외쳤던 이 여사는 1980년대 들어선 반독재·민주화 운동에 투신한 열사들과 연대하며 목소리를 냈고, 여러 번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하지만, 2000년대 ‘우리 시대의 전태일’인 비정규직 문제가 불거지자 다시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2007년 기륭전자를 비롯해 비정규직 문제가 심각해지기 시작하면서 다시 현장에 가신 것이죠. 끊임없이 희망 버스도 타시고. 돌아가실 때까지 계속 그렇게 하셨던 거예요.” 1995년부터 2003년까지 전태일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을 지냈고 ‘학생운동가’였던 이형숙씨는 이 여사가 해온 활동에 대해 “이념, 대가, 욕망, 욕심이 없었다”고 평가했다.

여성 운동가로서 이 여사는 여성 노동자들에게 노조 활동을 장려했다. 70∼80년대 평화시장 공장장이나 재단사는 모두 남자였다. 여성들은 미싱사나 시다로 일하며 저임금·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다. 유정숙씨는 “제가 노조 사무실에 갈 때마다 여성 노동자가 80% 이상인데 여성 간부가 없으면 안 된다고 제게 말하길래 ‘아무것도 모릅니다. 근로기준법도 모르는 사람이 그런 걸 할 수 없습니다’고 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이 여사는 여성 노동자에게 더 가혹했던 노동 환경 속에서 노조 간부들마저 남성들이 차지하는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본 것이다. 이숙희씨 또한 “1976년 청계피복노조에서 부녀부장을 빼면 노조 간부는 다 남자였는데 어머니가 박명옥 언니가 (지부장을) 하면 되겠다고 해서 박 언니를 중심으로 지도부를 세우려고 대의원 대회를 열기도 했다”고 말했다. 딸 전태리씨는 “어머니는 페미니즘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본인 스스로가 페미니즘의 선두주자 같은 삶을 살지 않았나라는 생각을 요즘 하게 된다. 여성으로서 자신의 에너지를 가두지 않고 드러내면서 온전히 자신의 삶을 살아낸 분”이라고 이 여사를 추억했다.

장필수 기자 fe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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