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자들이 주인공인 영화가 늘었지만, 그 다양성 안에 여전히 장애인은 없다. <보르코시건 시리즈>는 장애에 대한 편견을 흔쾌히 깨부순다. 씨앗을 뿌리는 사람 출판사 제공
<왕좌의 게임>에서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캐릭터는? 21세기 들어 세계가 가장 열렬하게 탐닉한 이 판타지 드라마는 정말이지 매력적인 캐릭터로 가득하다. 도무지 어떤 캐릭터를 골라야 할지 감이 오지 않을 지경이다. 그래도 역시 “아무것도 모르는” 주인공 존 스노우를 선택하는 사람이 가장 많을 것이라는 예측 정도는 할 수 있다. 아리아 스타크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그의 성장에 환호성을 질렀던 소녀들도 있을 것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는 티리온 라니스터다. 원작에서 그는 왜소증을 갖고 태어난 인물이다. 드라마에서도 실제로 왜소증을 가진 배우 피터 딩클리지가 연기한다.
왜소증 배우들을 우리는 영화를 통해 본 경험이 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코미디영화 <오스틴 파워>에서 ‘미니미’를 연기한 번 트로이어다. 하지만 번 트로이어의 캐릭터는 왜소증에 대해 사람들이 갖고 있는 편견을 그대로 반영한 것들이었다. 지난 세기 서커스에 곧잘 등장한 왜소증 환자들처럼 신체적 결점을 이용해서 웃음을 자아내는 역할 말이다. 피터 딩클리지는 달랐다. 그가 연기한 티리온 라니스터는 지적이고 놀라운 재능을 가진 전략가다. 어쩌면 <왕좌의 게임>은 영화·드라마 역사상 처음으로 왜소증 환자를 진지하고 인간적인 캐릭터로 다룬 작품으로 기록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티리온 라니스터 역시 주인공은 아니다. 그는 왜소증에 대한 편견을 부수는 캐릭터지만 극을 오롯이 이끄는 인물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런 캐릭터를 보고 싶다면 영화가 아니라 책을 예로 들어야 한다. 한국에도 출간된 에스에프(SF·과학소설) <보르코시건 시리즈>다. 이 시리즈는 1949년생 여성 작가 로이스 맥매스터 부졸드의 일생을 건 걸작이다. 그는 기계공학 교수 아버지의 영향으로 아홉살 시절부터 에스에프를 미친 듯이 읽기 시작했다. 그게 금방 직업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부졸드는 1971년에 결혼했고 두 아이를 낳았다. 육아와 집안일을 도맡아 하면서 간호사로 일하던 부졸드의 인생은 가족의 안온한 성전 안에만 머무르다가 끝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틈틈이 습작을 쓰기 시작했고, 1983년에 <보르코시건 시리즈>의 첫 작품인 <명예의 조각들>을 내놓았다.
<보르코시건 시리즈>는 에스에프 중에서도 하위 장르로 분류되는 스페이스 오페라다. <스타워즈>처럼 과학적 정합성에 지나치게 얽매이지 않는 모험물을 스페이스 오페라라고 한다. 배경은 인류가 우주로 진출해 거대한 문명권을 건설한 30세기다. 시리즈는 거기서 마일즈 보르코시건이라는 주인공이 벌이는 모험을 다룬다. 로이스 맥매스터 부졸드는 2012년까지 모두 16권의 시리즈를 썼다. 스페이스 오페라 팬들도 좋아했지만 이 하위 장르에 다소 딱딱하게 구는 비평가들도 찬사를 보냈다. 에스에프계의 노벨상이라고 이를 법한 휴고상과 네뷸러상도 몇차례나 받았다. 한국에서는 모두 10권이 나왔는데 더는 출간 계획이 없는 걸 보니 그리 잘 팔리지는 않은 모양이다. 여성 작가 에스에프들이 하나의 현상을 만들어내고 있는 한국에서 이 시리즈가 소수의 장르팬들에게만 읽혔다는 사실은 꽤 아쉬운 일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이 소설을 시작하자마자 장벽에 부딪혔다. 주인공 마일즈 보르코시건은 신분제 행성에서 귀족의 자제로 태어난 남자다. 여성 작가의 주인공이 하필 남자여야 하느냐는 불평이 나올 수도 있을 테지만 흥미롭게도 마일즈는 장애인이다. 키가 150㎝도 안 되는 왜소증 환자다. 등뼈는 휘었다. 어디 부딪히기만 해도 쉽게 부러지는 뼈를 갖고 살아간다. 여기서 당신은 내가 말한 장벽이 무엇인지 깨달았을 것이다. 우리는 장르소설을 읽을 때 주인공에게 스스로를 대입하려 애쓴다. 동일시하려 애쓴다. 심지어 우리는 젠더의 경계도 넘어서는 동일시의 재주를 익혀왔다. 여성들은 오랫동안 어쩔 도리 없이 남성 히어로에게 자신을 반영하는 기술을 터득해왔다. 남성들 역시 여성 히어로가 등장하는 장르물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에일리언> 시리즈를 보며 ‘저건 여성이 주인공이니까 나와는 상관없어’라고 생각하는 남성은 거의 없을 것이다.
장애인은 다르다. 장애가 없는 사람들이 장애인 히어로에게 자신을 대입하는 일은 거의 없다. 장애인을 주인공으로 한 장르물이라는 것 자체가 거의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보르코시건 시리즈>의 첫 몇권을 읽으며 묘한 이격감을 느꼈다. 나에게 존재하지 않는 장애를 지닌 인물의 육체적 콤플렉스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로이스 맥매스터 부졸드는 마일즈라는 인물을 괴팍할 정도로 무모하고 색욕과 명예욕에 사로잡힌 인물로 그린다. 나는 이 시리즈를 읽으며 마침내 깨달았다. 나는 단 한번도 육체적 장애를 가진 인물이 복잡한 내면을 가진 주인공으로 묘사되는 모험담을 읽은 적이 없었다. 육체적으로 유약한 주인공은 꽤 있다. 그들 역시 <캡틴 아메리카>처럼 초인이 되는 혈청이라도 맞은 후에야 히어로로 거듭난다.
스페이스 오페라 장르의 걸작에서
왜소증 장애 그대로 주인공 내세워
‘장애는 극복 대상’이란 편견 깨부숴
나는 시리즈를 읽으며 마일즈 역시 ‘정상적인’ 육체로 거듭날 것이라는 기묘한 기대를 갖고 있었던 것도 같다. 머리로는 ‘장애는 비정상이 아니다’라는 문장을 새기면서도 여전히 마음은 신체를 ‘정상’과 ‘비정상’으로 구분 짓고 있었다. 로이스 맥매스터 부졸드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캐릭터를 장애인으로 만들어 이슈를 프레이밍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캐릭터에게 한계를 주고 그가 어떻게 해내는지 두고 보자는 마음에 더 가까웠다.” 어쩌면 부졸드의 그런 의도가 마일즈라는 캐릭터를 진정으로 매력적인 인물로 만든 걸지도 모른다. 마일즈에게 장애는 극복의 대상이 아니다. 그라는 인간을 구성하는 하나의 특성일 따름이다.
<보르코시건 시리즈>는 한번도 영화화 소식이 전해진 적이 없다. 할리우드는 지난 몇년간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들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들을 만들어왔다. ‘다양성’이라는 새로운 시대의 사명에 답변을 내놓기 시작했다. 그 ‘다양성’에 여전히 장애인은 포함되지 않는다. 제임스 캐머런은 <아바타>에서 하반신을 쓸 수 없는 주인공을 등장시켰지만 그 역시 새로운 행성에서 새로운 몸을 부여받는다. 결국 장애는 어떤 방식으로든 극복되어야 한다는 서사만이 투자자들의 심사를 통과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보르코시건 시리즈>가 영화화되는 날을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 나는 이 쾌활한 모험담만큼 장애에 대한 나의 편견을 흔쾌하게 깨부수는 오락거리를 본 적이 없다. 장르의 세계에는 더 많은 로이스 맥매스터 부졸드가 필요하다. 더 많은 마일즈 보르코시건이 필요하다.
영화 잡지 <씨네21> 기자와 <허프포스트코리아> 편집장을 했다. 사람·영화·도시·옷·물건·정치까지 관심 닿지 않는 곳이 드문 그가 세심한 눈길로 읽어낸 인물평을 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