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발노동자들은 위험에 내몰려도, 자신을 지탱하거나 피할 곳이 없다. 지난달 29일 국회 앞에서 산재사망 건설노동자 458인 합동위령제가 진행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내가 처음 목격한 인간의 손발노동은 재봉틀 앞에서 작디작은 인형옷을 만들던 엄마의 가내 수공업 현장이다. 발은 발판을 밟아 동력을 만들고 손은 박음질하는 바늘 주변에서 재빠르면서도 섬세하게 움직인다. 작은 인형옷에는 얇고 찢어지기 쉬운 레이스가 달리고 아주 작은 스팽글과 구슬 등이 촘촘히 달린다. 손과 발은 집중하는 눈과 고도의 협력을 하며 화려하고 다양한 인형옷을 만들어낸다.
2005년 미국의 패스트푸드점 웬디스에서 일명 ‘손가락 칠리 사건’이 있었다. 붉은 칠리수프 안에 실제 사람의 손가락이 나와서 음식을 먹던 부부가 웬디스를 상대로 보상을 요구했다. 반전은 이것이 자작극이었다는 사실이다. 웬디스는 기업에 손해를 입혔다며 이들을 고소했다. 부부는 각각 9년과 12년 형을 받았다. 미국의 사회비평가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이 사건에서 손가락의 ‘출처’에 관심을 둔다. 그 손가락은 자작극을 벌인 사람의 지인에게서 ‘제공’받은 것이다. 범인들은 아스팔트 공장에서 일하다가 산재로 손가락이 절단된 지인의 몸을 가져와 칠리수프에 넣었다. 이 손가락을 잃은 사람은 과연 산재로 얼마나 보상받았을까. 노동자의 신체가 훼손되었다고 기업이 10년 안팎의 형을 받진 않는다. 신체가 훼손된 사람이 받을 수 있는 보상보다 기업의 이미지를 훼손시킨 사람이 훨씬 더 가혹한 처벌을 받는다. 그들의 손과 발은 이 사회에서 수많은 부품 중 하나로 취급받는다. 반면 기업은 이 사회의 ‘머리’로 군림한다.
손가락은 누구의 것인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가 만들어질 때 보수 진영에서는 “대통령의 수족이 될 우려”가 있다고 표현했다. 수족은 권력이 없는 하수인의 역할로 은유된다. ‘수족 부리듯이’라고 하면 깔보면서 부려먹는 대상을 일컫는다. 은유로서의 신체는 우리 몸의 위계와 연결된다. 인간의 몸이 팔다리가 없어도 생명을 유지할 수는 있지만 머리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수족은 가장 분주히 움직이는 신체이지만 하대받는다. ‘손발’에 대한 멸시는 바로 이 지구에서 손발노동을 담당하는 사람들을 멸시해도 괜찮다는 감정을 이끌어낸다.
지난해 12월 경기도 안양의 한 식품공장 설탕 보관 창고를 청소하던 노동자 두명이 갑자기 무너져 내린 설탕 더미에 깔렸고, 결국 40대 노동자 한명이 사망했다. 달콤한 설탕이 누군가의 생명을 집어삼켰다. 설탕의 맛이란 태생부터 고통의 쓴맛을 통과한 맛이다. 사탕수수 농장에서 노예들의 가혹한 손발노동으로 얻은 맛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농장의 노예는 사라졌으나 노동자들이 설탕 창고를 청소하다가 죽는다. 설탕에 깔렸지만 범인은 설탕이 아니다. 죽고 다친 노동자들은 외주 인력이었다. 손발노동은 외주화된다. ‘머리’들은 이 외주화한 손발에 대한 책임감이 없기에 청소노동자들의 안전에 무심하다.
건물 외벽을 청소하던 노동자가 추락한다. ‘추락했다’고 과거형으로 쓸 수 없을 정도로 자주 발생한다. 최근 3년간 39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평균 잡으면 한달에 한명이 넘는 셈이다. 달비계에 대한 규정이 무의미했다고 한다. 달비계가 무엇일까. 단단한 작업용 로프와 작업대로 만들어져 그들의 몸을 받쳐주는 그네처럼 생긴 장치다. 공중에 매달려 발 디딜 곳 없이 작업하는 노동자를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이렇게 위험한 작업을 비숙련 아르바이트생에게 맡긴다. 9월 서울 구로구 한 아파트의 외벽 청소를 하다 20층 높이에서 추락사한 20대 초반 노동자는 군입대 전 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던 비숙련 노동자였다.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은 반복적 노동을 통해 분명히 체득 지식이 있지만 그 지식에 권위가 부여되지 않는다. 그래서 노동의 숙련도를 존중하지 않고 그저 단가를 맞추기 위해 저임금으로 비숙련 노동자에게 위험한 일을 넘기거나 두명이 할 일을 한 사람에게 맡긴다.
이러한 의도적 무지와 방치 속에서 손발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추락하고 깔린다. 그들의 손발은 공중에 떠 있거나 깊숙한 곳에서 움직인다. 지탱할 곳이 없거나 피할 곳이 없다.
중년 여성 배우들이 같이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예능 방송에서 배우 박원숙이 주방의 개수대 앞에 서서 이렇게 말한다. “예전에 엄마가 그랬는데, 여자가 더러운 걸 많이 만져야 집이 깨끗하대.” 그의 손은 개수대의 수챗구멍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이 장면이야말로 우리가 사는 ‘깨끗한 세상’의 진실을 잘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 안에서는 여성에게 손발노동을 전담시키고 집 밖으로 나가면 저소득 계층, 나아가 저소득 국가에서 온 노동자들에게 손발노동을 외주 준다. 손발노동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을 뿐이다. 그렇기에 어떤 사람은 그 손발노동이, 가장 멸시해도 괜찮은 세계라고 여기는 ‘아프리카에나' 있다고 착각한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경선 후보는 “지금 기업이 기술로 먹고살지, 손발로 노동을 해서 되는 게 하나도 없다”며 “그건 인도도 안 하고 아프리카나 하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가 노동만이 아니라 기술에 대해서도 아무 이해가 없다고 본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손발에서 연장된 도구(망치, 칼 등)를 다루는 기술과 머리에서 연장된 도구(컴퓨터 등)를 다루는 기술이 있으나 윤석열이 말한 기술은 후자에 국한될 것이다.
‘머리’가 로켓을 타는 동안
기술의 발전보다 중요한 문제는 그 기술을 누가 소유하느냐이다.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는 우주 관광의 역사를 썼다며 박수 받았지만 아마존의 배송기사들은 화장실에 갈 시간도 없어서 페트병에 소변을 본다고 폭로했다.
일상에서 인공지능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플랫폼 산업을 보자. 이 기술의 소유자들은 세련된 기술을 대표하는 미래의 얼굴처럼 등장하지만 이 기술을 직접 몸으로 전달하는 사람은 결국 손발노동을 한다. 지난 8월 누군가의 다리를 대신하던 배달노동자는 교통사고로 다리를 절단했다.
모든 노동의 과정을 마주할 일이 없다 보니 ‘첨단’으로 보일 뿐이다. 점점 노동이 보이지 않게 만들어 노동을 소외시킨다. 그 소외를 통해 착취의 발판을 만들어 ‘머리’들은 이윤을 얻는다. 많은 사람들은 손발노동으로 먹고산다. 베이조스가 전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로켓을 타고 100㎞ 상공까지 수직으로 오르는 동안 누군가의 손발은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한 채 로켓배송을 하느라 땅 위에서 100㎞ 이상을 위험천만하게 오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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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영 예술사회학자 _ <여자를 위해 대신 생각해줄 필요는 없다>(2020) <타락한 저항>(2019) 등의 저자. 사회의 구석구석을 비평합니다. 아름다우면서도 정확한 비평의 가능성을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