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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그 알량한 숫자 하나로 나는, 나의 남편이 됐다

등록 2021-11-06 15:13수정 2021-11-06 15:23

[한겨레S] 김비의 달려라 오십호(好)
차별금지법, 제정하라!
그림 박조건형
그림 박조건형

통신사 고객센터와 하는 전화 통화는 스무고개 같다. 그러니까 애초부터 한번이면 가능하리란 기대를 버리고 시작한다. “상담원이 모두 통화 중이어서…”라는 관문을 여러차례 지나 마침내 상담원과 통화가 되더라도, 아직 넘어야 할 관문은 끝나지 않았다. 트랜스젠더인 나에게, 그러니까 태어날 때 기록된 성별과 실제 내 삶의 성별이 다를 경우 그 관문은 넘어서야 하는 또 한 고개가 된다. 통화상에 내 음성이 남성의 것으로 들리는 건지, 본인임을 확인하기 위해 다시 또 생년월일을 부르고 주소를 댄다. 그러고도 다시 한번 본인이 맞냐고 확인한다.

다행히 지금은 호적 정정을 한 이후이니 불편함은 전화 통화에 그치지만, 호적 정정 이전에 남자 주민등록증을 들고 대리점을 찾으면 단번에 황당한 요구와 맞닥뜨린다. 남편분 것 말고 본인 것을 달라고. 처음에는 이게 무슨 말인가 나조차 곰곰이 그 의미를 헤아려야 했지만, 똑같은 패턴의 곤란마저 반복되다 보면 황당하게도 ‘여유’가 생긴다. 그걸 여유라고 부르는 일이 온당한지 모르지만, 이따금 나는 그 상황을 예측하고, 조금도 어긋남 없이 들어맞는 상황을 즐기기도 했다. 내가 나의 남편이 되고, 나는 그 남편의 아내가 되어 여기 당신 앞에 한 몸으로 서는 ‘신비롭고 아름다운’ 판타지.

스무고개 하듯 통신사 고객센터서
태어날 때 성별을 요구받던 일상

그깟 숫자 몇개가 뭐라고

그러나 아무리 개인의 기분을 앞세우고 억지 여유를 끌어다가 대도 불편함은 나 말고도 여러 사람의 불편함이고, 불평등이라면 너무도 일상적이어서 선뜩한 불평등이다. 사회 구성원으로 필요한 기본적인 정보를 담는 일이라면 지역이나 나이 정도면 되는 일, 아니 어쩌면 그것마저도 필요 없는 일, 우리가 숫자 몇개에 담는 정보는 너무 과도하다.

‘편리’를 따지자면 2020년대에 걸맞은 방식이 있을 텐데, 그깟 숫자 몇개로 정체를 의심받고 인격까지 부정당하며 곤혹스러운 일을 맞닥뜨려야 하는 사람들이 실재한다. 성소수자뿐만이 아닐 것이다. 그깟 숫자 몇개가 뭐라고 그거 하나 바꾸려면 절차는 또 왜 그리 복잡한 건지. 눈앞에 선 사람이 사람인 사실 하나면 됐지, 우리 사회는 사람을 대하는 정책이나 태도는 점검할 줄 모른 채, 간단히 한 사람을 부당한 존재로 만들고 만다. 숫자나 규정 속에 머물 수 있는 누군가는 정당한 존재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부당한가? 나는 내가 사는 여기 이 나라, 이 사회의 수준이 그 정도는 아니라고 믿는다.

내가 나의 남편이 되고 마는 ‘신비롭고 아름다운’ 판타지 이야기를 조금 더 하자면, 신분증 속 ‘나의 남편’이 실은 남편이 아니라 바로 나라고 말하면, 지극히 일상적이던 상담 업무의 공기는 순간 마비된다. 그리고 직원은 조용히 나를 올려본다. 조금 당황한다. 그러면 나는 먼저 직원의 당황함을 풀어줄 말을 찾곤 했다. ‘제가 좀 특이하지요? 아유, 특이해서 죄송합니다.’ 그렇게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뱉고 나면 분위기는 약간 (최소한 겉으로는) 부드러워지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되진 않는다. 이제 신분 확인을 위한 직원과 나 사이의 분투가 시작된다.

직원은 ‘뭐 이런 사람이 나한테 걸려, 오늘 일은 골치 아프겠네’ 정도의 소감일지 모르지만, 나로서는 그날 하루가 아니라 매일 일상적으로 부딪혀야 하는 곤란이었다. 서로를 불편하게 하는 그 무거운 공기를 견딜 수 없어 내가 먼저 ‘쉰 소리’를 하는 이유는 ‘잠깐의 불편함’일 수 있는 그 찰나가 온종일, 아니 며칠 동안 내 어깨를 깔고 앉아 나를 형편없는 인간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어디에도 너를 위한 인정은 없다, 어디에도 너를 위한 기록은 없다.’ 마치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말아야 할 것 같은 사람 취급받는 경험은, 생각보다 훨씬 더 지독하고 아프다. 매 순간 그 경험을 견뎌야 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일 수 없다. 이제 나이가 들어 웬만큼 공력이 쌓인 나조차 어떤 날은 견딜 수 없는 환멸과 자학에 빠지게 되니 말이다.

그래도 이따금 뜻하지 않은 반짝거림을 만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한번은 제주도에 사는 복희씨 곁에 살려고 주소를 옮기기 위해 구좌읍사무소에 갔는데, 젊은 남자로 보이는 공무원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있지도 않은 ‘나인 내 남편’을 찾았다. 다시 또 잠시 잠깐의 무겁고 신비로운 공기가 읍사무소 안을 지그시 내리누르는 찰나, 그는 다행히 별일 아니라는 듯 지문을 찍어 확인하자고 했다. 그러나 우리의 지문 확인 시설이, 단박에 퍼센티지로 결과를 도출하는 미국 범죄 드라마 속에서나 보던 최신 기계일 수는 없으니, 그는 내가 찍은 지문과 주민등록증을 같이 들고서 형광등 불빛에 비춰 한참을 들여다봤다.

고개를 이리저리 갸웃거리다가, 그는 결국엔 그 두개를 들고서 상급자의 데스크로 뛰기 시작했다. 한눈에 모두 볼 수 있는 열린 공간이던 읍사무소 여기저기에 ‘고개 갸웃거리기 바이러스’가 퍼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이 나를 흘끔거릴 때마다 웃으며 살짝 인사를 했다.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하다’는 뜻이었지만, 그 마음이 제대로 전달되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지난 12일 ‘2021 차별금지법 연내 제정 촉구 도보 행진 평등길 1110 차별금지법 제정 백만보 앞으로' 기자회견이 국회 앞에서 열리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지난 12일 ‘2021 차별금지법 연내 제정 촉구 도보 행진 평등길 1110 차별금지법 제정 백만보 앞으로' 기자회견이 국회 앞에서 열리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당사자는 환멸·자학에 빠지게 돼
포괄적 차별금지법 연내 처리돼야

따뜻한 그 한마디 “제 할 일인데요”

그는 읍사무소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다 못해 2층에 높은 분들 방까지 뛰어올라 갔다 와서는, 약간은 상기된 표정으로 다시 내 앞에 섰다.

“저 때문에 괜히 고생이 많으시네요.” 나는 진심으로 서로 불편한 일을 만들고 마는 이 상황이 미안해 말했는데, 그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아닙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그는 그렇게 대답하고서 나에게 새로운 주소가 기록된 남자 주민등록증을 내밀었다. 여자의 모습으로 남자 주민등록증을 받아 드는 나나, 그런 걸 내밀어야 하는 공무원인 그나 기이한 상황이긴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나는 그가 건넨 그 한마디 덕분에 아주 오래 마음이 든든했다. 그때 우리를 지킨 건 결국 사람을 사람으로 존중하고 동등한 태도를 보여주려 애쓴, 어느 젊은 청년의 지극히 온당한 마음가짐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신비롭게만 머물 수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부산에서 서울까지 성소수자들이 20일 넘게 두 발로 길 위를 걷고 있다. 조금이라도 빨리 가려고 하고, 남들보다 먼저 가기 위한 길을 찾는 게 당연한 이 시대에, 오직 한가지 마음을 전달하기 위해 한걸음씩 믿음의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모두의 바람으로 상정된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연내 처리 기한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또 있는 듯 없는 투명한 존재가 되어버리는 ‘신비로운’ 삶을 살지 않기 위해 그들은 온몸으로 자신의 삶을 증명하고, 우리의 온당한 마음에 질문을 던지며 걷는다.

누군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게 아니냐고, 해야 할 일을 해달라고 요청하기 위해. 우리는 걷지만 ‘귀하’께서는 제발 뛰라고 말하기 위해. 차별금지법, 제정하라!

김비 소설가. 50대에 접어들어 성전환자의 눈으로 본 세상, 성소수자와 함께 사는 사람들과 그 풍경을 그려보고자 한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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