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기관이 제3자에게 임의로 제출받은 피의자의 휴대전화 등을 통해 별도 범죄 혐의를 발견했더라도 따로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지 않거나 피의자의 참여권을 보장하지 않았다면 증거로 사용할 수 없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재판장 김명수 대법원장)는 준강제추행 및 불법촬영 혐의로 재판을 받아온 ㄱ씨에게 증거능력 인정 부족으로 일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18일 밝혔다. ㄱ씨는 대학교수로 2014년 12월 충북 청주시 흥덕구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ㄴ씨와 술을 마신 뒤, 취해 누워있던 ㄴ씨 신체를 자신의 휴대전화 카메라로 불법촬영했다.
이 사실을 안 ㄴ씨는 20여분 뒤 경찰에 신고하며 ㄱ씨 소유 휴대전화 두대를 임의제출했다. 경찰은 ㄱ씨에게 두 휴대전화에 저장된 사진과 동영상 확인을 요청했고, ㄱ씨는 이 가운데 한 휴대전화에 저장된 ㄴ씨 동영상을 확인해줬다. 그러나 ㄱ씨는 또다른 휴대전화 잠금 화면을 해제하지 못했다. 이 휴대전화에 ㄴ씨 사진이 숨겨져있다고 의심한 경찰은 휴대전화 두대를 모두 포렌식하기로 했다. ㄱ교수는 자신이 먼저 확인해준 휴대전화 압수수색에는 참여하겠다고 했지만, 나머지 휴대전화 포렌식에는 참여할 의사가 없다고 밝혔다.
경찰은 휴대전화 분석결과, ㄱ교수가 포렌식에 참여하지 않은 휴대전화에서 그가 2013년에도 비슷한 범행을 한 사실을 확인했다. 그해 12월 자신의 집에서 남성 제자 두명과 송년회를 한 뒤, 만취한 이들의 신체를 자신의 휴대전화로 불법 촬영한 것이다.
재판에 넘겨진 ㄱ씨는 1심에서 징역 6개월과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2심은 ㄱ씨에게 벌금 300만원을 선고하며 2013년 12월 범죄사실에 대해선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ㄱ씨가 포렌식에 참여하지 않은 휴대전화에 저장된 영상물을 증거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대법관 모두가 참여하는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전원일치 의견으로 2심 판단이 옳다고 봤다. “피의자가 소유·관리하는 정보저장매체를 피해자 등 제3자가 제출한 경우, 내부에 저장된 전자정보의 제출범위에 관한 특별한 의사표시가 없으면 임의제출에 따른 압수의 동기가 된 범죄혐의사실 자체와 구체적·개별적 연관관계가 있는 전자정보로 제한해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전원합의체는 “휴대전화 등을 탐색하거나 복제·출력할 때에는 피의자에게 참여권을 보장하고 압수한 전자정보 목록을 교부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어 “임의제출된 정보저장매체에서 압수 대상이 되는 전자정보 범위를 초과해 수사기관 임의로 전자정보를 탐색·복제·출력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위법한 압수수색에 해당해 허용될 수 없다”고 덧붙였다.
법조계에선 이번 대법원 판결로 수사 현장에 큰 변화는 없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2015년 이른바 ‘종근당 판결’을 통해 대법원이 압수수색 절차 전반에 걸쳐 피압수자의 참여권 보장을 강화해야 한다고 판결했는데, 이번 판결이 그 연장선상에 있다는 이유에서다. 앞서 2015년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011년 이뤄진 검찰의 종근당 압수수색에 “디지털 증거 수집 과정에 위법성이 있다”며 압수수색 전체를 취소하라고 판결한 바 있다. 한 검찰 간부는 “‘종근당 판결’을 통해 검찰 현장에서 별개 증거가 나오면 즉시 중단하고 압수수색 영장 새롭게 받아야 한다는 내용이 정착됐다. 피의자 아닌 제3자가 임의제출한 경우에 대해 임의제출 범위를 더 엄격하게 봐야 한다는 의미 정도로 파악된다”고 말했다.
전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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