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1월26일 서울 중구 인권위에서 열린 출범 현판식. 국가인권위원회 제공
2001년 11월26일,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가 문을 열고 진정을 접수하자 차별과 인권침해를 토로하는 수많은 시민들이 몰렸다. ‘1호 진정’은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보건소장 임명에서 배제된 제자를 대신해 김용익 서울대 의대 교수(현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가 제기했다. 설립 첫해 한 달여 만에 803건의 진정이 접수됐다. 군부독재를 겪은 시민들이 권력으로부터 독립된 국가인권기구에 건 기대는 그만큼 컸다.
25일 출범 20주년을 맞는 인권위에는 그동안 15만8790건의 진정(10월 기준)이 접수됐다. 인권위의 시간은 한국 사회에 만연한 차별을 하나씩 없애고, 인권 감수성을 높여온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그만큼 스무살 인권위 앞에는 더 버거운 과제가 기다리고 있다. 더 다양하고 내밀한 영역에서 벌어지는 차별을 해소해달라는 요구들이 급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초창기 인권위는 일상 속 차별을 발굴하고, 법과 정부 정책에 도전했다. 크레파스의 ‘살색’을 피부색 차별이라고 판단하고, ‘살구색’으로 대체하도록 권고(2002년)한 것은 당시 신선한 충격을 줬다. 국가보안법 폐지 권고(2004년), 사형제 폐지 의견 표명(2005년), 양심적 병역거부 인정 및 대체복무제도 도입 권고(2005년) 등 권위주의 정권 시절 억눌려 있던 ‘인권’을 공론장으로 끌어올렸다.
2003년에는 인권위가 노무현 정부의 이라크 전쟁 파병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하며 논란이 되기도 했다. 국정에 정면으로 반대 의견을 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무현 전 대통령은 당시 “인권위는 원래 그런 일을 하라고 만든 곳”이라며 힘을 실어줬다.
‘노동은 인권위 영역 밖’이라는 반발에도 노동 문제에 꾸준히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2005년 인권위는 비정규직 노동자 보호를 위한 정부의 2개 법안에 대해 “비정규직 근로자의 노동인권을 보호하기에 충분하지 못하다”는 의견을 표명했는데, 김대환 당시 노동부 장관은 인권위의 의견 표명이 ‘월권적 행위’라고 반발했다. 이후에도 인권위는 공공부문 청소용역근로자 인권개선 정책권고(2007년), 5인 미만 사업장 근로조건 개선을 위한 법령 및 정책 개선 권고(2008년), 방송영상제작 스태프 노동인권 개선 정책권고(2012년), 여성 감정노동자 인권개선을 위한 정책권고(2016년) 등을 통해 노동자 인권 개선에 목소리를 냈다.
2001년 11월26일 인권위 진정 접수 첫날 서울 중구 인권위에서 진정인이 크레파스 ‘살색’이 피부색 차별이라는 진정을 접수하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 제공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 조직 축소 등 부침을 겪으면서도 명맥을 유지해온 인권위에 이제는 사회 거의 모든 영역에서 판단하기 어려운 ‘숙제’들이 쏟아지고 있다.
공권력에 의한 고문 등 인권침해 진정이 대부분이었던 과거와 달리 판단이 쉽지 않은 일상의 차별에 대한 진정이 늘고 있다. 2002년에는 공권력에 의한 인권침해 진정이 2214건으로 대부분(79.4%)이었고, 공권력과 법인·단체·사인에 의한 차별 진정은 136건으로 전체 진정의 4.9%에 불과했다. 지난해 접수된 차별 진정은 2385건으로 전체 진정의 26.7%에 달했다. 2001년부터 인권위에서 근무해온 서수정 인권위 차별시정총괄과장은 “출범 초기에는 나이, 성별, 장애 등 인권위법에 명시된 차별 사유와 관련된 진정이 대부분이었는데 최근에는 법에 명시되지 않은 기타 차별 관련 진정이 증가했다”고 말했다. 서 과장은 “법에 명시된 사유 관련 진정도 과거에는 장애를 이유로 고용을 거부하는 등 보다 명백하게 판단할 수 있는 차별에서 최근에는 장애인의 키오스크와 웹 접근성 등 기술의 발달과 관련된 것이 많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12월 농업인, 해수면 상승지역 거주민, 기후우울증 피해자 등이 기후위기로 생명권과 건강권을 침해받았다며 진정을 제기한 것처럼 새로운 영역의 의제도 자꾸 나온다. 인권위 관계자는 “과거와 달리 지금의 인권 문제는 기후, 정보, 의학, 경제 등 다양한 영역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어려운 문제라는 걸 절감한다”고 말했다. 인권위는 해당 진정을 인권위에서 다루기 적절하지 않은 사안으로 보고 진정 자체는 각하했지만, 정책권고로 다루기 위해 관련 실태조사를 발주했다.
이라크 무장단체에 납치된 김선일씨가 살해됐다는 소식이 알려진 2004년 6월23일 오전 서울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인권시민단체 회원들이 국가인권위원회의 이라크 파병결정 철회의견 표명 촉구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미투운동과 페미니즘 리부트, 백래시(성평등에 대한 반발성 공격)를 겪으며 인권위에 접수되는 성차별 관련 진정의 양상도 변했다. 특히 올해는 ‘역차별을 당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남성들의 성차별 진정이 이례적으로 여성들의 성차별 진정 건수를 넘어섰다. 성차별시정팀이 신설된 2018년까지만 해도 여성들이 출산을 이유로 겪는 불이익이나 직장에서의 복장 규정 등 전통적인 성차별 진정이 대부분이었는데, 최근에는 온라인 커뮤니티 등을 중심으로 제기되는 ‘여성 우대’ 정책과 여성전용 시설 관련 불만이 인권위 진정으로도 이어지는 것이다.
최혜령 성차별시정팀장은 “남성들의 성차별 진정이 서서히 늘다가 지난해 말부터 눈에 띄게 증가했다”며 “지난해에는 전체 성차별 진정 중 24%가 남성에 의한 진정이었고, 올해는 현재까지 전체 성차별 진정의 60%가량이 남성에 의한 진정으로 여성의 진정 건수를 뛰어넘었다”고 밝혔다. 최 팀장은 “정부기관의 여성 관련 정책뿐 아니라 개인이 운영하는 여성전용 체육시설 등 일상의 여성전용 시설에 대해서도 차별이라는 진정이 들어온다”며 “여성들은 실질적 평등을 주장하는 데 반해, 일부 남성들의 경우 형식적인 평등을 주장하는 내용이 많다”고 말했다.
인권위는 지난해와 올해 제천 여성전용도서관과 남성의 입주 신청을 제한한 안산 행복주택에 대해 성차별로 판단한 바 있다. 관련 법 등 여러 사항을 고려한 결정이지만 ‘여성 우대’나 여성전용 시설 일반에 대한 결정으로 받아들여지거나 백래시에 효능감을 줄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내부에서도 나왔다고 한다.
과거에는 진정의 주체로 드러나지 않았던 아동·청소년 당사자들의 진정도 늘었다. 청소년 유해매체물 차단 등을 위한 앱이 아동·청소년의 기본권을 침해한다는 진정이 대표적이다. 지난 3월 인권위는 이러한 앱의 기본권 침해를 최소화해야 한다고 권고한 바 있다. 박병수 아동청소년인권과장은 “기존에는 진정인이 부모나 주변 성인 등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최근에는 아동·청소년의 직접 진정이 늘어나는 추세”라며 “어떠한 권리를 침해당했는지도 구체적으로 짚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시민사회에서는 사회가 복잡해진 만큼 인권위가 논쟁적인 사안에 보다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명숙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활동가는 “인권에 대한 요구가 다양해진 만큼 인권위가 단호하게 입장을 정해 대처해야 하는 사안들이 있는데, 최근 인권위는 조직이 관료화되고 논쟁적인 사안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과 교수는 “비교적 단순한 논점 위주였던 과거의 인권 문제에 비해 20년 동안 인권 문제가 복잡하고 판단하기 어려워진 것이 사실”이라면서도 “인권에 대한 국민들의 눈높이가 높아진 만큼 인권위가 한발 더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데, 과거에 비해 그러한 모습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김윤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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