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법정에는 창이 없다. 환한 빛이 드는 법정은 영화와 드라마에만 존재한다. 외부와 차단된 이 공간에서 매일 수많은 이들의 한숨과 환호가 교차한다. 몇 줄 판결문에 평탄했던 삶이 크게 출렁이기도 하고, 스스로 어쩌지 못했던 누군가의 삶은 전환점을 맞기도 한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보통 사람들의 재판은 우리 이웃을 한 뼘 더 이해할 수 있는 가늠자다. 평범한 이들의 재판이 열리는 법정에 작은 창을 내려는 이유다.
눈물을 흘리며 그는 서 있었다. 지난 1일이었고, 인천지법의 한 법정에서였다. 치솟는 울음을 힘껏 삼켰지만, 소용이 없었다. “내가 가난하고 못 배워서 나를 이렇게 대하는 건가, 생각했어요. 살고 싶은데 왜 나를 내버려 두지 않는지….” 밤새 준비하고 연습한 말들은 울음에 섞여 계통없이 터져 나왔다. 눈물에 막혀, 그는 준비한 말을 끝내 다 하지 못했다. 그런 모습에 옆에 앉아 있던 법률대리인도 숨죽여 눈물을 닦았다.
김수민(가명·25)씨는 일을 하면서 벗어날 수 없었던 ‘채무의 굴레’에 수차례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다. 우울증과 공황장애, 대인기피증도 얻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주변의 도움을 받아 회사를 상대로 ‘채무부존재 확인 소송’을 제기했고, 지금 1심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시작은 2017년 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21살이던 김씨는 친구 소개로 수도권에서 통신사 대리점 20곳을 넘게 운영하는 한 정보통신 업체에 입사했다. 주 6일, 오전 10시~밤 9시까지 휴대전화와 이동통신상품을 팔고, 매장 청소 등을 하는 것이 주된 업무였다. 한 달에 기본급으로 120만원을 받고 성과급을 받는 조건이었다. 아버지 회사가 부도나면서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일찌감치 생업 전선에 뛰어든 그에게 이곳은 동아줄과도 같은 직장이었다.
그러나 일을 하면 할 수록 통장에 돈이 쌓이는 것이 아니라 빚만 늘어갔다. ‘실적을 채우지 못했다’는 이유로 김씨는 석 달 동안 기본급을 포함해 급여를 한 푼도 받지 못했다. 대신 회사는 이 기간 모두 550만원을 그에게 ‘가불’ 형식으로 지급했다. 이는 김씨가 갚아야 할 채무였다. 빚은 점점 더 불어났다. 김씨가 ‘급여를 받지 못했다’며 약 일주일 동안 출근하지 않자, 회사는 해당 기간의 손실을 계산해 김씨에게 부담하게 했다. 이듬해 1월, 회사는 김씨의 가불금 및 각종 손해배상액을 더해 ‘약 1900만원을 갚아야 한다’는 취지의 차용증을 작성하고 공증을 받게 했다. 김씨는 회사의 요구대로 차용증을 썼고, 18개월 동안 매달 50만~200만원을 급여에서 공제하는 방식으로 돈을 갚아 나갔다. 김씨는 2019년 7월 상환을 끝내고 퇴사했다.
퇴사하면 빚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다 갚았다고 생각한 빚은 김씨가 퇴사한 지 2년 반이 다 돼가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를 괴롭히고 있다. 이 업체는 퇴사한 김씨의 채무가 1800만원가량 남았다고 주장하는 상황이다. 그가 퇴사하기에 앞서 상품을 팔았던 고객들에게 받은 민원을 해결하기 위해 회사가 돈을 대납했으니, 김씨가 이를 갚아야 한다는 것이다. 김씨가 재직하는 동안 고객에게 약속한 단말기 할부 지원금을 주지 않는 등 여러 잘못을 저질러 고객 민원이 발생했다는 것이 회사쪽 주장이다. 또 김씨가 재직 중 ‘자신이 맺은 계약 건으로 인해 발생한 모든 고객 민원은 자신에게 책임이 있고, 계약이 끝나도 추후 발생할 수 있는 고객 민원을 성실히 처리할 의무가 있다’는 내용으로 회사와 계약서를 쓴 만큼 김씨에게 책임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는 입장이다.
반면, 김씨쪽은 회사가 주장하는 고객 민원 내용을 두고 사실이 아니라며 억울함을 토로하고 있다. 회사가 제시하는 민원 가운데 김씨가 체결하지 않은 계약 건도 있고, 또 어떤 민원은 김씨가 이미 책임지고 배상한 건인데 모두 김씨가 갚아야 할 금액으로 계산됐다는 것이다. 김씨 쪽은 준비서면에 ‘회사가 특정 고객에게 소송에서 증언을 해주면 원하는 휴대폰을 주겠다고 하고 그 기곗값을 김씨의 채무로 남겼다’는 주장을 담기도 했다.
김씨의 법률대리인인 윤지영 변호사는 ‘김씨로 인한 민원이 지금도 제기되고 있다’는 회사쪽 입장에 “계약 해지 이후 무한책임을 규정하는 계약서는 무효”라고 주장한다. 윤 변호사는 “회사는 김씨에게 잘못이 있든 없든 (판매한 상품에 대해) 무한책임을 져야 하고, 김씨의 책임에는 기한도 상한도 없다는 것이다. 고객의 민원만 있다면 퇴사한 후에도 기약 없이 김씨는 불확실한 손해에 대해 무한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인데, 이 사건 규정들은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에 위반한 것으로서 민법 103조에 따라 무효”라고 말했다.
통신업계에서는 김씨처럼 휴대전화 등을 파는 ‘판매사’에게 상품 판매에 따른 책임을 지도록 하는 계약이 일반적이지만, 사후에 회사가 이번 사건과 같은 수준의 손해배상 책임을 묻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라는 반응이 나왔다. 비수도권에서 통신사 대리점을 운영하는 ㄱ(37)씨는 “판매사가 자신이 판 상품에 책임을 지는 건 당연하다. 다만 대리점 대표자도 판매사가 소비자와의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고 있는지 수시로 확인하고 관리해야 하는데, 그동안 1천만원 넘는 규모의 민원이 발생하도록 방치해뒀다는 게 의문”이라고 했다. 또 다른 통신업계 관계자도 “대리점주가 판매사에게 민원 처리 책임을 묻는 경우가 많은 건 사실이나, 이 사건 규모는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회사 쪽은 “김씨가 스스로 (계약) 내용을 자유롭게 검토하고 판단한 뒤에 서명한 이상, 문서에 기재된 (무한책임) 규정의 적용을 피할 수 없다”고 맞서고 있다. 김씨가 ‘사기 판매’를 했다고 말하는 이 회사 대표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고객이 매장에 와서 항의하면 단골도 다 떨어지고 우리 이미지 손실도 엄청나다. 여기 판매사도 많은데 ‘사기로 판매해도 넘어가는구나’ 해버리면 영업 못 한다”고 말했다. 이 사건 판결은 오는 15일에 선고될 예정이다.
신민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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