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서울 보신각에서 열린 3.8 세계여성의날 기념 37회 한국여성대회. 사진 한국여성단체연합
‘역대급 여성 배제 선거’라는 평가가 나온 20대 대선 결과를 두고 많은 20·30대 여성들은 ‘혐오가 이겼다’는 식으로 해석되지 않길 바라고 있다. 이들은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의 ‘무고죄 처벌 강화’와 ‘여성가족부 폐지’ 공약이 이행될 경우 ‘여성 혐오’가 더 강해질까 우려한다. 이러한 가운데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호신용품을 샀다’거나 호신용품과 관련된 정보를 올리는 글이 꾸준히 올라온다. 왜일까?
9~10일 한때 트위터 실시간 트렌드에 ‘호신용품’이 올라왔다. 스프레이·경보기·가스총 등 호신용품을 전문으로 판매하는 한 업체는 “오늘(10일) 호신용 경보기 주문량이 지난 일주일 평균과 비교해봤을 때 20∼30% 정도 늘어났다”고 말했다.
호신용품을 찾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러한 현상 뒤에는 윤 당선자가 ‘성범죄 처벌 강화’ 공약을 하면서도 ‘무고죄 처벌 강화’와 ‘여성가족부 폐지’ 공약도 내세운데 따른 우려가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무고죄는 성폭력 피해자를 가해자로 둔갑시키며 피해 여성의 입을 막는 경우가 많아 여성단체들이 무고죄 처벌 강화 공약을 폐기하라고 요구해왔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지난 2019년 대검찰청과 공동개최한 양성평등정책포럼에서 발표한 자료를 보면, 성폭력 가해자가 상대방을 무고죄로 고소한 사건(2017~2018년) 중 유죄로 확인된 것은 전체 6.4%에 불과한 것으로 집계되기도 했다. 여성가족부 폐지 역시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지원 축소로 연결될까 우려하는 이들도 있다.
실제 호신용품을 사거나 관심을 보이는 이들은 무고죄 처벌 강화가 여성에게 성폭력 피해의 공포를 더 크게 느끼게 한다고 말한다. 성폭력 피해를 당해 신고해도 법으로 보호를 받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스스로 자신을 지키겠다는 마음으로 호신용품을 찾는다는 것이다.
대구에 사는 이아무개(23)씨는 10일 오전 온라인 쇼핑몰에서 짧은 막대 모양의 ‘쿠보탄’이라는 호신용품을 주문했다. 이씨는 “제가 어떤 피해를 입었을 때 국가로부터 보호를 받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무고죄 처벌을 강화한다고 했을 때 피해자에게 불리한 법이 적용된다는 것인데, 혹시라도 범죄에 노출됐을 때 최소한 스스로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들은 여성가족부 폐지, 무고죄 처벌 강화 등의 흐름이 여성에 대한 혐오로 이어질까 우려한다. 대학생 유아무개(20)씨도 이날 오전 호신용 스프레이를 주문했다. 유씨는 “윤 당선자가 (선거 기간에) 여가부 폐지나 여성혐오 공약을 말할 때마다 같은 학교 남학생들이 ‘페미니스트를 죽이고 싶다’고 말해왔다”며 “그때마다 무서웠는데 윤 후보가 당선된 뒤 그 남성들의 말이 자꾸 생각나서 호신용품을 구매했다”고 밝혔다. 부산에 사는 중학생 김아무개(15)양도 “여성 인권이 떨어진다면 언제 어디서 저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위험하다는 생각이 든다”며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 부모님이 사준 호신용 경보기를 꺼냈다”고 말했다.
남성들도 가족과 지인을 걱정해 호신용품을 찾는 이들이 있다. 경기도에 사는 남성인 오아무개(20)씨는 가족과 친구 등 주변의 여성들에게 호신용품을 사서 나눠주려 한다. 그는 “누나도 있고 주변에 여성들이 많다. 여성들이 걱정하는 것 중 하나가 여성과 소수자에 대한 혐오여론의 증폭”이라며 “미국에서 트럼프 당선 이후 심해진 인종차별처럼 여성이 예전보다 일상의 안전을 더 걱정하게 되는 날이 오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서울에서 사업을 하는 남성 하아무개(54)씨도 올해 대학 신입생이 된 딸을 위해 호신용 스프레이와 경보기를 샀다. 그는 “이번 선거에서 젠더 혐오를 공개적으로 내세운 후보의 득표 현황을 보며 막연한 우려가 생각보다 훨씬 가까이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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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혜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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