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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내 나이 50살, 더 나은 여성성 꿈꾸며 한번 더 ‘트랜스’

등록 2022-06-18 15:18수정 2022-06-18 15:40

[한겨레S] 김비의 달려라 오십호(好)
나의 ‘트랜스’ 일지

치마를 입고 사람들 앞에 서는 일
그 주입된 익숙함을 넘어 살아가기
나를 밀어올린 여성성 되짚어보니
공감하는 힘, 가장 높은 곳의 가치
박조건형 그림.
박조건형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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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치마를 입던 순간을, 나는 꽤 선명하게 기억한다.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짙은 갈색 스커트는, 고급스럽거나 멋스럽기는커녕 속치마도 없던 소위 ‘캉캉 치마’였다. 1990년대 후반이었고 그즈음 그런 스타일이 유행이긴 했지만, 허벅지살이 훤히 들여다보일 만큼 치마는 얄팍하고 허름했다. 나는 그 치마를 사두고서 여러 날을 밖에 입고 나가지 못하고 집에서만 입었다 벗었다 했다.

여성의 삶을 치마 입는 삶으로 단순 치환할 줄밖에 몰랐으니, 지금 생각하면 나 역시 성별 이분법적 주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한 사람이었다. 여성으로 살아야 하니까 당연히 화장을 하고, 당연히 치마를 입어야 한다고만 생각했다. 수술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옷은 그냥 옷일 뿐이란 걸 깨달았다. 그 이후로 ‘트랜스젠더인데 왜 치마를 입지 않느냐’는 무례한 질문에 ‘왜 내가 치마를 입어야 하느냐’고 반문할 줄 알게 되었지만, ‘처음’이란 시간은 나에게도 어려웠다. 서툴렀고, 옳고 그름을 제대로 가릴 줄 몰랐다. 질문하거나 의심할 줄도 몰랐다. 익숙한 ‘분위기’를 옳음이라고 여겼고, ‘주입’을 교육이라고 믿었다. 그러니 여성의 삶을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나에게, 치마를 입고서 사람들 앞에 서는 일은 이겨내야 할 첫 관문처럼 느껴졌다.

김비 작가가 여행 중 얼굴을 씻는 모습. 김비 제공
김비 작가가 여행 중 얼굴을 씻는 모습. 김비 제공

‘온전한 나’를 찾아간다는 것

치마를 입고서 처음 밖에 나간 날은 일부러 정신을 반쯤 집에 두고 문을 나섰다. 화장도 하지 않았고, 가발 같은 걸 쓰지도 않았고, 대낮이었다. 수술도 하기 전이었고 호르몬 치료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나는 치마 하나만 입은 남자였을 것이다. 차도 끌고 가지 않고 에코백 하나만 맨 채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버스 맨 앞자리에 타고, 그러고 서울 종각에서부터 종로3가까지 오락가락 걸어 다녔다. 당연하다는 듯 몇몇 사람들은 돌아봤고, 헛웃음을 지었고, 전혀 신경쓰지 않는 사람도 여럿이었다.

치마를 입기 전까지 나는 그 옷 하나가 내 정체성의 지표라고 믿었고 그래서 꼭 입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러고 펄럭이며 돌아다니다가 집에 돌아왔을 때 나는 그저 하루 종일 걸어 종아리가 퉁퉁 부은 피곤한 몸이었다.

처음 브래지어를 착용했던 때도 비슷했다. 호르몬 치료를 받으며 조금씩 가슴이 몽실대기 시작하면서 브래지어를 입어야 하는 순간이 나에게도 다가오고 있었다. 검은색이었다고 기억하는데 그걸 팔에 끼우고 어깨에 걸자마자 단박에 까끌거리는 그것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불편하다는 걸 알았다. 이미 그때 나는 삼십대였지만, 이삼십대 여성들에게 유행이라는 그 제품은 온통 레이스로 뒤덮여 있었다. 도대체 가슴을 모으는 게 왜 그리도 중요한지 브래지어 컵의 반절은 두툼한 스펀지로 가득했다. 그런데도 나는 모든 것이 ‘익숙함’의 문제라고만 생각했다. 

다른 여성들이 그러하듯 나 역시 익숙해지면 이 불편함과 까끌거리는 느낌이 내 몸의 일부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온전한 내가 되기 위해 그러한 불편함쯤 견뎌낼 수 있는 몸이어야 하는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때 나는 여성인 나로 산 게 아니라, 이 사회가 만들어놓은 여성이란 틀로 살았다. 그때의 나 역시 나를 찾지 못하고, 또 다른 성별의 껍데기에 나를 억지로 끼워넣고 있었다. 다양한 여성들에게 다양한 선택지가 있어야 한다는 걸 상상할 줄 몰랐다.

물론 오십대 여성으로 사는 지금도 속옷을 입는다. 그러나 지금 내 속옷의 절대적 기준은 편안함이다. 후크가 있거나 와이어가 있는 속옷을 지금은 절대 입지 못한다. 그마저도 현관문에 들어서면 모두 벗어버리고 실내복 원피스 하나만 걸쳐 입는다. 그래도 이따금 발코니라도 나가야 할 때가 있어 캡이라도 달린 걸 사려다가 지금은 그냥 헐렁하고 편한 원피스 하나만 걸치고 집 안에서만큼은 자유롭게 돌아다닌다. 햇살을 즐기는 사람이라 나는 커튼도 치지 않고 사는데, 보거나 말거나 이 집 안에서만큼은 내 멋대로 산다.

그래서 지금 내 피복을 굳이 성별로 따지자면 ‘트랜스답게’(?) 복합적이다. 화장은 여성, 윗옷은 남성, 카디건은 여성, 바지는 여성, 신발은 남성, 속옷은 여성. 아, 요즘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며 사니 화장도 선크림 하나만 바른다. 그러니 그 얼굴은 중성?

이거 왜 이러시냐고, 트랜스젠더인 당신들이야말로 성별 이분법에 목매어 치료하고 수술까지 감행하는 양반들이 아니냐고 따져 물을 사람들이 있겠지만, 문 밖에서의 내 성별이 무엇이든 간에 내가 인식하는 내 몸의 성별이 여기 내가 가진 것과 다르다면 별 도리 없는 일이 아닌가? 가능하다면, 치료를 받고 수술을 할 수밖에.

서툴렀던 여성이나 남성의 처음처럼, 트랜스젠더 성별의 누군가 역시 서툴렀을 뿐인지도 모른다. 갖지 못한 제 정체성이 너무도 간절해 반드시 원하는 성별로 보이는 것만이 유일한 희망인 것처럼 느끼게 되는 누군가를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그들의 간절함 역시 나이를 먹고 제 나름의 편안함을 찾아가게 되리라 생각한다. 지금은 ‘브래지어’를 입지 않고 ‘속옷’을 입어야 편안한 나라는 걸 알게 된 것처럼. 억압된 세계 속에 억눌려 살던 누군가의 갈급했던 자유가 제 길을 찾는 데는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말이다.

꽃은 늘 반갑다. 김비 제공
꽃은 늘 반갑다. 김비 제공

다시, 가능성으로서 ‘여성성’

나이 오십의 여성이 되어, 나는 요즘 나의 여성성을 다시 생각한다. 지정성별 여성들의 것과는 꼭 같을 수 없겠지만, 나를 밀어올린 것들 중에 ‘여성성’이라고 명명될 만한 것들을 되짚어본다. 간단히 폐기하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여성의 의미를 잘못 표기하며 이 사회가 필요한 방식으로 그 의미를 한정시키고 가두었을 뿐, 여성의 의미는 더 확장되고 멀리 뻗어 나아가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가능성의 측면에서 ‘여성성’이란 이름은 더욱 다채로운 근육을 얻고 생기를 실감하며 키를 키워가야 하는 것인지도.

그중에 가장 높이 평가되어야 할 가치는, ‘공감하는 힘’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동안 여성을 착취하는 도구로만 전락했던 공감의 능력은, 이제 성별의 경계를 넘어 모든 인간에게 절대적인 필요조건이 되었다. 자신만의 신념과 아집으로 타자를 배제하는 인간성 상실의 위기 속에서, 공감하는 인간만큼 위로가 되는 존재가 또 있을까? 측은지심에 머무르는 공감이 아니라 시대와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단호하면서도 품 넓은 공감의 가치를 지닐 수 있는 사람. 그 힘을 이용해 다시 또 착취하려는 움직임에는 단호히 맞서고, 협소해지거나 얄팍해지지 않도록 우리의 사회적 몸을 발전시켜 나아갈 수 있는 그런 사람.

나는 다시 한번 그런 여성이 되길 꿈꾼다. 또 한번, ‘트랜스’한다.

박조건형 그림.
박조건형 그림.

김비 | 50대에 접어들어 성전환자의 눈으로 본 세상, 성소수자와 함께 사는 사람들과 그 풍경을 그려보고자 한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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