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의 한 고등학교 교사 ㄱ씨는 제자인 여학생들을 빈 교실로 데려가 ‘나는 너를 좋아하는데 너는 싫냐’ 등의 말을 하며 손이나 무릎을 접촉해 강제추행(아동·청소년의 성 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기소됐다.
그러나 2018년 국민참여재판에서 배심원들은 만장일치로 ㄱ씨에게 무죄 평결을 했다. 재판부가 “피해자의 진술은 전후 내용이 자연스럽고 매우 구체적이며, 피고인도 직접 사과했다”는 등의 이유로 벌금 1천만원을 선고한 것과 반대되는 결과였다.
사법정책연구원에서 지난 20일 공개한 ‘성폭력 범죄의 특수성과 국민참여재판에서의 배심원 지침에 관한 연구’ 보고서에서 박기쁨 판사(사법정책연구원 연구위원)는 이 사례를 분석하며 “배심원의 판단은 성 고정관념이 반영된 결과”라고 봤다. 박 판사는 “피해자 진술을 뒷받침할 다른 증거도 있었지만 배심원들은 피고인이 학교 선생님이라는 점 또는 피해자들이 뒤늦게 고소한 점에 집중해 ‘만약 여성이 성폭행을 당했다면 빨리 경찰에 신고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등의 통념 등으로 (피해자들이)피고인에 대한 반감으로 뒤늦게 피해사실을 지어내거나 과장한 것으로 판단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2008∼2020년 열린 국민참여재판에서 배심원은 무죄 평결을 했지만 재판부가 유죄 선고를 한 성범죄 사건 24건을 모두 분석한 보고서는 성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공정한 평의를 할 수 있도록 ‘배심원 지침’ 도입이 필요하다고 제언한다. 판사가 배심원에게 성폭력 범죄의 특성을 설명할 수 있는 매뉴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국민참여재판에서 성폭력 범죄의 무죄 판결 비율은 살인·강도 등 다른 형사 사건에 비해 높게 나온다. 법원행정처가 분석한 2008~2020년 국민참여재판 범죄별 무죄율을 보면 강도(8%), 상해(6.24%)에 비해 성범죄는 21.88%로 3배 가까이 높다. 보고서는 “성 고정관념이 높을수록 성폭력 인지도가 떨어지고, 강간통념을 수용할수록 (성범죄를) 덜 폭력적인 것으로 인식한다”며 “실제 국민참여재판에서 평결과 판결이 불일치하는 사건을 검토한 결과 그 사건 내용상 배심원들의 평결에 ‘강간통념’이 작용한 것으로 판단됐다”고 짚었다.
강간통념은 ‘여성이 성관계에 대해 노(NO)라고 말하는 것은 종종 실제로 예스(Yes)를 의미한다’거나 ‘여성은 낯선 사람으로부터만 성폭행을 당한다’는 등 성폭력 범죄를 정당화할 위험이 있는 사회적 통념을 의미한다.
2019년 6월 모텔에서 술에 취한 피해자를 강간한 사건에 대해 1심 재판부가 징역 3년을 선고한 사건에 배심원 5명이 다수로 무죄 판단을 한 것에 대해 보고서는 배심원의 강간통념이 반영됐다고 봤다. 당시 재판에서 소극적인 자세로 피고인 손에 이끌려 모텔로 들어간 피해자의 모습이나 ‘어제 일은 미안하다’는 등 피고인이 보낸 메시지 내용이 공개됐다. 보고서는 “이 사건은 피해자 진술을 뒷받침할 시시티브이 영상이나 카카오톡 메시지가 있음에도 다수 배심원은 ‘여성은 남성이 강간을 하도록 유혹한다’거나 ‘성폭력 피해자라면 이렇게 할 것이다 또는 이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고정관념에 따라 피해자 진술 신빙성을 인정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박 판사는 배심원이 성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평의를 할 수 있도록 판사가 배심원에게 성폭력 범죄의 특성을 설명할 수 있는 ‘배심원 지침’ 도입이 필요하다고 봤다. 미국은 주마다 배심원 지침을 두고 판사가 재판 진행 과정에서 각 사안의 성격에 맞는 사례를 설명하도록 한다.
캘리포니아 지침을 보면 강간 사건일 경우, 지침은 검사가 입증해야 할 사안과 그 구체적 요건을 정리해놨다. “여성은 성관계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점을 입증해야 할 때 동의의 의미가 무엇인지 등을 자세히 적고, ‘다음과 같은 경우 그녀의 동의 없이 성교행위가 이뤄진 것으로 본다’며 강간에 해당하는 사례를 나열하는 식이다. 영국은 성폭력 범죄 중 아동에 대한 ‘그루밍 범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대한 지침도 구비하고 있다.
보고서는 국외 사례를 토대로 △피고인과 피해자가 연인·부부일 경우 △고소가 뒤늦게 이뤄진 경우 △피해자가 성매매를 했거나 유흥접객원인 경우 △성폭력 사건 이후 피해자가 피고인에게 친근하게 행동한 경우 △피해자 진술의 일관성이 문제 되는 사건일 경우 등 여러 성범죄 사건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상황과 조건을 가정해 배심원이 성 고정관념에 갇히지 않는 지침을 만들 수 있다고 제언한다.
장예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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