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채널에스> 방송에 출연한 김설믜씨. 유튜브 갈무리
2018년 9월25일, “제 이름 좀 지켜주세요”란 제목의
청와대 국민청원이 올라왔다. 청원자 이름은 ‘김설믜’. 그는 그해 서울예술대학교에 입학한 대학생이었다. 그러나 2017년 받은 학교 합격통지서에는 그의 이름이 ‘김설?’라고 표기돼 있었다. 학교 전산시스템이 과거에 쓰던 한글 입력 인코딩(변환)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나타난 문제였다. 지혜와 총명함을 뜻하는 순수 우리말인 ‘설믜’는 전산시스템에선 문자로 인식되지 않았다.
“주민등록상 이름(김설믜)과 휴대폰 명의상 이름(김설미)가 맞지 않아 결국 장학금도 못 받았다”는 설믜씨는 이름을 지켜달라는 청와대 청원을 올렸고, 당시 <한겨레>도 설믜씨 이야기를 기사로 다뤘다. 보도 과정에서도 설믜씨 이름이 온라인과 지면 기사에
특수문자로 노출되면서 웃지 못할 해프닝이 생기기도 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2022년 10월, 설믜씨 이름을 담지 못했던 전산시스템은 얼마나 바뀌었고, 설믜씨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9일 <한겨레>는 설믜씨를 둘러싼 ‘문자 환경’을 재점검해봤다.
설믜씨 이름이 애초에 각종 전산시스템에 제대로 입력되지 못한 것은 대부분 민간 시스템이 과거 제한적인 한글 입력 변환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는 탓이다.
대부분 국내 정보시스템은 1987년에 마련된 ‘EUC-KR’ 코딩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영어와 달리 한글 조합은 1만1172가지나 되는 탓에 사용 빈도수가 높은 2350자만 뽑아 만든 시스템이다. 당시 낮은 수준의 피시(PC) 사양 등을 고려한 대책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믜’는 2350자 안에 포함되지 못했고 전산시스템은 이렇게 30년 넘게 유지됐다.
정부는 설믜씨 사례와 같은 문제점을 인식해 2010년부터 정부 행정 시스템에 모든 한글을 표기할 수 있는 UTF-8 변환 방식을 사용토록 방침을 변경했다. 이후 정부 행정 업무에서는 더는 한글 문자 입력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다수 민간 회사들은 여전히 기존 시스템을 고수했다. 설믜씨 같은 사례가 자주 발생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2018년 당시 <한겨레>가 김설믜씨 기사를 송출했다가 시스템 문제로 인해 이름이 제대로 표기되지 않았다.
특히 비대면 시대에 인증 절차가 중요한 가운데, 당시 설믜씨가 이용한다던 한 이통사는 여전히 같은 인코딩 방식을 쓰고 있었다. EUC-KR을 쓴다는 이통사 관계자는 <한겨레> 취재 당시에는 “큰 문제인지 몰랐다”는 반응이었다. 그러다 전산시스템을 담당하는 부서와 협의 후에 해당 관계자는 “내년 상반기 이후로 모든 한글 입력이 가능한 시스템으로 바꿀 것”이라고 밝혔다. 통신사 실명 가입은 인증 절차가 많아진 최근 비대면 시대에서 특히나 중요해졌다. 은행 계좌 개설 및 각종 인증 과정에서의 불편함도 통신사 인증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EUC-KR 방식의 인코딩을 사용하는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문제는 알고 있었다. 내부에서 몇 년 전부터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은행 특성상 정보가 여러 기관과 공유되는데 이 과정에서 시스템을 바꾸는 방식이 쉽지는 않다”고 했다. 금융당국도 큰 문제거리로 여기지 않았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소비자보호 관점에서 큰 문제는 없다고 보지만, 통신사 가입 실명과 신분증 이름이 일치하지 않아서 계좌개설이 어려운 경우는 발생할 수 있다”고 했다.
설믜씨가 다녔던 서울예대는 내년에서야 시스템이 새로 도입된다. 서울예대 관계자는 “내년 1월부터는 새로운 전산시스템을 도입한다. 앞으로 (설믜씨와 같은) 사례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밝혔다.
<한겨레>도 2019년 웹시스템(WCMS)을 개편하면서 한글 인코딩 문제를 해결했다. <한겨레> 시스템부는 “2018년에는 시스템 환경이 정착되지 않아 한글이 깨지는 현상이 있었다. 지금은 UTF-8로 변환할 수 있도록 개선됐다. 정상적으로 기사를 작성하면 해당 문제는 발생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김형중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교수는 “이름도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데 정보통신(IT) 시스템도 이를 따라가야 한다. 한글 입력 방식은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서도 충분히 바뀔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설믜씨는 결국 자신의
이름을 지키지 못하고 2020년 개명했다. 조금씩 바뀌고는 있지만, 설믜씨 이름을 지켜주기 위한 시스템 변화의 속도가 느렸던 탓이다. 현재 군복무 중인 설믜씨를 대신해 그의 친누나가 <한겨레>에 설믜씨의 근황을 전달했다.
설믜씨 군복 왼쪽 명찰에는 개명한 ‘설미’가 대신 새겨져 있다. 군입대 전인 지난 3월 <채널에스>의 예능 프로그램
‘진격의 할매’에 직접 출연한 설믜씨는 여행하다 신분증을 잃어버려 등본 등을 발급받는데 전산 오류가 생겨 함께 간 친구에게도 피해를 끼치는 일이 발생하자 “다른 사람까지 피해를 볼 수 있겠다”는 생각에 결국 개명을 했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설믜씨는 여전히 설믜로 살고 있다고 한다. 연기를 전공하고 졸업한 뒤 배우가 된 설믜씨의 활동명은 여전히 ‘김설믜’다. 그의 누나는 “무대에 오를 때 여전히 설믜란 이름으로 올라갑니다”라고 전했다.
곽진산 기자
kj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