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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화학자 김희준 선생님의 부고를 들었다. 미국식으로 치러진 추모식 사진과 영상을 보면서 홀로 선생님 생각을 했다. 선생이 오랜 미국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서 강의를 시작했을 때, 학교 잡지 일을 맡아 인터뷰를 했다. 선생과 함께 같은 과목을 나눠 맡아 강의를 하기도 했다. 늘 기억이 나는 것은, 학생식당의 긴 줄에 서서 나누었던 소탈한 이야기들. 신앙이 깊어 한잔하지 않으실 줄 알았는데 맛나게 소주 한두병은 뚝딱 비우시던 모습. 와병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도 잘 이겨내시겠거니 뵙지 못했던 것이 후회가 되지만, 선생과 나눈 이야기와 배운 것들은 잊을 수가 없다. 죽음을 사이에 둔 이별은 기억으로 남는다.
어떤 기억은 오래 남는다. 살아남은 기억은 복잡하게 얽혀 있기 십상이고 그 매듭들이 나를 지탱한다. 집에 누워서 편히 영화를 볼 수 있어도 굳이 영화관을 찾는 이유는 아마도 영화관에서 느낄 수 있는 ‘영화적 경험’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일 것이다. 영화관 외출을 준비하고 집을 나서 상영관까지 갈 때 탄 버스, 지났던 거리. 영화관의 고소한 팝콘 냄새와 매점 앞에서 기다리던 친구. 옆자리에 앉았던 사람의 향수 냄새, 노란 구두.
책도 읽고 나면 기억으로 남는다. 책의 내용을 줄줄 읊지 않아도 인상적인 장면이나 구절, 그리고 그것을 읽은 시간과 공간이 얽혀 사람마다 다른 기억으로 자리 잡는다. 표지의 촉감, 색깔 그리고 촘촘한 본문과 그림들. 그 속에서 일어났던 사건들과 그 장면을 읽을 때 앉았던 소파. 마침 들러 그 장면과 겹쳐진 카페의 불빛과 시큼한 커피 맛. 그날따라 을씨년스럽던 창밖 풍경까지 함께 뇌리에 깊게 새겨져 있다. <퇴근길엔 카프카를>은 책의 경험과 기억하는 방식에 대한 만화다.
작가는 ‘한 권, 혹은 아주 적은 수의 책을 반복해서 읽는 독서 생활을 꿈꾸는’ 사람이다. 반복 속에서 섬세한 것들을 관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매일 아침 마주치는 같은 골목길에서 변화와 새로움을 발견하는 사람. 어떤 책은 베끼면서 읽고, 또 어떤 책은 입으로 따라 읽는다. 어떤 책은 도서관에서 찾던 책 곁에서 우연히 만나고 어떤 책은 서점에서 부러 찾아 만난다. 책상에 바르게 앉아 읽는 책과 차창을 내다보면서 기차에 삐뚜름히 앉아 읽는 책은 느낌의 색깔이 다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옆자리에 앉은 사람도 눈치챌 수 없는 여행이다.
<보이지 않는 도시들>을 읽으며 세상의 모든 도시, 상상 가능한 모든 도시들을 여행하지만 끊임없이 떠올리는 도시는 서울. 이야기를 지나면서 살고 있는 도시를 읽고 상상한다. <페스트>를 읽으며 이 도시에 닥친 재난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사고, 재해, 전쟁…. 국가적, 사회적 폭력이라는 이름으로 재앙이 닥쳤을 때,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벽 앞에 선 듯 무기력한 상황에 빠질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닥친 재앙을 체념하거나 받아들이지 않고 성실하게, 쉼 없이 싸우고 버텨나가는 것이 거대한 재앙과 알 수 없는 세상 앞에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태도이다. 슬픔이 엉긴 기억을 손에 꽉 쥐고.
만화애호가
종이나 디지털로 출판되어 지금도 볼 수 있는 국내외 만화를 소개하고 그에 얽힌 이야기를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