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열쇠 수리업체를 운영하는 백아무개(68)씨는 몇년 전 얼굴을 잘 알던 회사 고위 임원이 도어락을 열어달라고 해서 도와줬다가 경찰 조사를 받았다. 알고 보니 해당 임원이 퇴사 후 회사 쪽에 보복하기 위해 백씨 손을 빌린 것이었다. 백씨는 “그 사건 이후 문을 열어달라고 할 때 무조건 집주인 등의 신원을 확인한다”며 “종종 낯선 사람들이 문을 열어달라고 할 때 돈이 필요한 열쇠공들은 덜컥 열어주는 경우가 있는데, 각자 양심에 맡게 행동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최근 부산에서 집주인이 여행으로 집을 비운 사이 40대 남성이 열쇠 수리공을 불러 도어락을 무단으로 뜯고 들어가는 등 열쇠공을 통해 강제로 문이 개방되는 사건이 끊이지 않고 발생하고 있다. 이에 수리비만 내면 집 문이 강제로 열릴 수 있다는 불안감도 커지고 있지만, “양심에 맡겨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제도적 빈틈은 여전히 메워지지 않고 있다.
19일 법조계 설명과 판결문 등을 종합하면, 남의 집 도어락을 무단으로 절단한 사건에서 지시한 사람에게는 일반적으로 주거침입과 함께 재물손괴 혐의가 적용된다. 그러나 직접 문을 연 열쇠공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지난달 17일 부산에서 한 여성의 집에 열쇠공을 불러 도어락을 교체해달라고 한 40대 노숙인이 주거침입 및 재물손괴 혐의가 적용돼 검찰에 송치됐다. 그러나 이때도 열쇠공은 수사 선상에 오르지 않았다.
이는 형법상 과실이 예외적인 경우에만 처벌하는데 재물손괴는 예외 사유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수리비를 내고 문을 뜯어달라고 요구한 상황이라면, 열쇠공이 고의를 가지고 문을 열었다고 보지 않는다. 강승기 변호사는 “열쇠공의 경우는 집주인인 줄 알고 대상 자체를 착오한 것이기 때문에 과실로 보게 된다”며 “신원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는 문제는 있겠지만, 이 문제로 형사처벌할 수 있는 규정은 없다”고 말했다.
열쇠공을 공동재물손괴 혐의로 보더라도 지시한 사람과 공모했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하는데, 이 역시도 쉽지는 않다. 이에 무단으로 열쇠 잠금장치 및 도어락을 훼손하는 경우를 막으려면 사실상 열쇠공의 양심에 맡겨야 가능한 상황이다.
열쇠공에 대한 등록·허가 규정이 없는 탓에 사업장을 마련하는 데에도 제한은 없다. 열쇠협회 추산으로 국가공인열쇠관리사 자격시험도 전체 수리공 중 4%만 취득하고 있다. 열쇠공에게 신원조회를 할 수 있거나, 신원조회를 강제로 하는 법률도 없다. 반면 미국 캘리포니아·앨라배마 등 일부 주에서는 공인 자격증이 있어야 열쇠공으로 일할 수 있다. 자격증 발급 전 미 연방수사국(FBI)를 통해 범죄 경력 배경 조사를 받아야하는 규정도 있다.
국내에서는 지난 20대 국회에서 이명수 국민의힘 의원이 개문 관련 범죄를 사전 예방한다는 취지로 열쇠관리업을 신설하고 열쇠 및 잠금장치 작업과 관련해 신원확인 등 관리체계를 마련한다는 내용의 ‘경비업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으나 무산됐다. 경찰 관계자는 “관련 입법이 돼있다면 열쇠공들도 경각심을 가지고 업무에 임하지 않겠느냐”며 “정치권에서도 관심을 가져주면 유사 사례가 방지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곽진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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