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대표적인 장기미제사건인 ‘제주 변호사 피살사건’으로 20여년 만에 재판에 넘겨진 피고인에게 대법원이 살인 혐의를 무죄 취지로 판결했다. 대법원이 피고인의 살인 혐의를 인정할 증거가 부족하다고 판단하면서, 23년 넘게 미제로 남아있던 이 사건은 다시 미궁에 빠지게 됐다.
대법원 2부(주심 천대엽 대법관)는 살인, 협박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김아무개(57)씨에게 징역 12년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광주고법으로 돌려보낸다고 12일 판결했다. 원심은 김씨의 살인 혐의를 유죄로 판단했지만, 대법원은 무죄로 판단했다.
제주지역 폭력조직 ‘유탁파’에서 행동대장급 조직원으로 활동했던 김씨는 1999년 검사 출신 변호사 이아무개(사망 당시 45)씨를 살해한 혐의 등으로 2021년 재판에 넘겨졌다. 김씨는 1999년 8월 “피해자를 손 봐줘야겠다”는 지시를 받아 현금 3천만원을 받고 친구 손아무개씨와 함께 공모해 이 변호사를 살해한 혐의를 받았다. 두 사람은 피해자를 미행해 귀가시간 등 생활패턴을 파악했고, 그해 11월5일 새벽 손씨가 피해자를 향해 두 차례 흉기를 휘둘러 숨지게 한 것으로 조사됐다. 손씨는 2014년 8월 극단적 선택으로 숨졌다.
검찰은 2019년 10월 김씨 본인으로부터 제보를 받은 <에스비에스(SBS)> ‘그것이 알고 싶다’ 쪽의 수사 의뢰를 받아 수사에 착수한 뒤 김씨를 기소했다. 당시 김씨는 피디(PD)에게 ‘지금은 사망한 유탁파 두목 백아무개씨가 피해자를 혼내주라는 지시를 해 손씨와 상의했다. 손씨가 혼자 가서 실행하다가 피해자가 사망했다’는 취지의 제보를 했고, 검찰은 김씨의 공소시효가 남았다고 판단해 살인 혐의의 공동정범으로 재수사한 뒤 그를 기소했다. 김씨는 자신이 검찰 수사대상에 오르자, 검찰에 수사를 의뢰한 ‘그것이 알고 싶다’ 피디를 협박한 혐의도 받았다.
1심은 김씨의 협박 혐의는 유죄로, 살인 혐의를 무죄로 보고 징역 1년 6월을 선고했다. 김씨의 제보진술과 검찰이 제시한 증거만으로 김씨의 살인 혐의를 인정하기 어렵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2심은 김씨 진술의 신빙성이 인정되고 살인에 대한 미필적 고의 등이 인정된다며 징역 12년을 선고했다.
대법원은 다시 살인 혐의에 대한 증명이 부족하다며 무죄 취지로 원심을 파기환송했다. 김씨의 제보진술 중 주요한 부분이 객관적 사실과 다르고, 제보진술을 뒷받침하는 객관적 증거나 구체적 정황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대법원은 “이 사건 범행에 관여한 지시자 백씨와 실행자 손씨 모두 이미 사망한 사람으로 제보진술의 신빙성 확인이 애초에 불가능하다. 김씨가 피해자 가해를 지시받은 점이나 손씨와 범행을 공모했던 흔적 등 김씨의 제보진술에 부합하는 객관적 증거도 없다”며 “설령 김씨 제보진술 일부에 신빙성을 인정하더라도, 범행 현장 상황 등 정황증거만을 종합해 손씨와 김씨의 살인의 고의 및 공모 사실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이현복 대법원 공보연구관은 “이 판결은 공소사실에 부합하는 피고인의 진술이 형사재판에서 합리적 의심을 배제하고 공소사실을 입증할 만한 신빙성을 갖추었는지에 관해 보다 신중하게 판단할 것을 요구함으로써 무죄추정의 원칙을 강조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며 “진술의 주요한 부분에 배치되는 객관적 사정이 밝혀져 그대로 믿을 수 없는 경우, 나머지 진술 부분을 신빙해 공소사실을 유죄로 인정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근거나 증거가 제시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판결”이라고 설명했다.
신민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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