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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만학으로 ‘지식’보다 ‘사람’ 얻으니 인생 황금기네요”

등록 2023-02-13 19:58수정 2023-02-14 02:35

[짬] 경복고 부설 방송통신고 1학년생

방송통신고 1학년 만학도들이 서울 자하문로 경복고 교정에서 최근 펴낸 시집 <백 마디 고마움>을 소개하고 있다. 왼쪽부터 박경옥·고지환·이순숙·최재서·이도환 학생. 김아리 객원기자
방송통신고 1학년 만학도들이 서울 자하문로 경복고 교정에서 최근 펴낸 시집 <백 마디 고마움>을 소개하고 있다. 왼쪽부터 박경옥·고지환·이순숙·최재서·이도환 학생. 김아리 객원기자

누군가에게 지겨운 공부가 누군가에는 평생의 갈망이기도 하다.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배움을 이어가지 못한 어르신들이 뒤늦게 고등학교에 입학해 국어, 영어도 배우고 물리, 화학도 공부하면서 함께 시집도 펴냈다. 최근 출간된 <백 마디 고마움>(휴머니스트 펴냄)은 경복고등학교부설 방송통신고교 1학년 113명이 한 편씩 쓴 시들을 묶어낸 책이다. 대부분 60∼70대에서 많게는 90대까지 늦깎이 학생들이 쓴 시들은 고단했던 인생 속에서 길어올린 슬픔과 아름다움의 순간들을 생생하게 포착해내고 있다. 평생 노점상으로 일하신 어머니에 대한 애처로움, 자전거에 만두를 싣고 팔러 나갔다가 고갯길에서 뒹군 사연, 식당을 하던 시절 밥만 먹고 도망가던 손님들에 대한 안타까운 기억 등이 한 폭의 수채화처럼 그려져 있다.

지난 11일 서울 자하문로 경복고 교정에서 저자 중 5명과 지도교사를 만나 시집을 출간하게 된 배경과 만학도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어봤다.

60~90대 늦깎이 입학생 113명

국어교사 권유로 1년간 습작

‘삶의 기쁨과 슬픔 오롯이 표현’

첫 시집 ‘백 마디 고마움’ 펴내

“뒤늦은 학교생활 그저 고마워”

인세 유네스코한국위원회 기부

휴머니스트 제공
휴머니스트 제공

지난해 3월 개학 첫 국어수업 시간, 최인영(54·서울사대 부여중) 교사는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을 읽으면서 수업을 시작했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머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여기까지 읽자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최 교사는 다음 구절을 읽기가 어려웠단다. “그때 다짐했죠. 정말 열심히 수업해야겠다”고. 학생들은 단 한 명도 졸지 않고 눈을 반짝이며 수업에 임했다.

2학기를 시작하며 학생들에게 다 함께 시를 써서 시집을 출간해보자고 제안하자 학생들 대부분은 “어림도 없는 일”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 학생들에게 최 교사는 생활 속 모든 것을 글감으로 삼는 법을 알려주었고, 혹여 꾸중이라도 들을까봐 주저주저 내놓은 학생들의 시에 “폭풍 같은” 칭찬을 해주었다. 그러자 다들 몇 편씩 꾸준히 써내게 됐다. 각자 자신의 시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른 학생들은 지도교사와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여러차례 깎고 다듬어 ‘첫 작품’을 세상에 내놓게 됐다.

고지환(70)씨는 “내 시가 뭐가 좋다고 선생님이 칭찬을 하시는 건지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나중에 보니까 내 시에 내 마음이 그대로 묻어나 있다는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 실제로 113편의 시에는 삶의 기쁨과 슬픔이 오롯이 묻어나 있다. 이도환(69)씨는 “남편에게 내 시를 보여주자 어려웠던 옛 시절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다”고 말했다. 박경옥(67)씨는 “남의 시를 읽으면서 나만 그렇게 힘든 인생을 산 게 아니구나, 내 인생을 성찰하는 기회가 되었다”고 했다.

이들 다섯명은 모두 어린시절 초등학교만 졸업한 뒤 생계 전선에 뛰어들었고, 60대 중반즈음 방송통신중학교를 졸업한 뒤 바로 고교에도 입학했다. 남들보다 50여년이 늦었지만 그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단다. 국·영·수도 열심히 배우고, 체육시간에 줄넘기나 고무줄놀이도 하고, 봄에는 소풍, 가을에는 체육대회도 한다. 20여 가지나 되는 동아리 활동도 골라서 참여하고 반장, 부반장에도 손을 들고, 총학생회 선거에도 출마해본다.

이도환씨는 “그 시절에 그렇게 하고 싶었던 것을 다 하니까 학교 가는 날은 아침부터 마음이 들뜬다”며 “학교 생활이 삶의 활력소이자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박경옥씨는 특히 교복 체험을 잊을 수가 없단다. 그는 “어려서 빨래줄에 널려있는 교복이 얼마나 부럽던지 동생 교복을 몰래 입어보기도 했다”면서 “학교에서 옛날 교복을 빌려서 다 같이 입게 해주고, 우리 시절 음악인 ‘여고시절’(이수미 노래)을 틀어줬는데 지금도 생각하면 목이 멘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좋은 것은 꿈에서나 바라던 ‘졸업장’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순숙(66)씨는 “얼마 전에 서류를 낼 일이 있어서 학력난에 ‘중학교 졸업’이라고 쓰니까 얼마나 좋던지, 2년 뒤에는 ‘고등학교 졸업’이라고 쓸 수 있으니 생각만 해도 신난다”며 “주변 친구들에게도 학교에 다니는 게 얼마나 좋은지 많이 권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재서(72)씨는 “안 겪어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사회 생활을 할 때 항상 ‘학교는 어디 나오셨어요?’라는 질문이 참 힘들었는데 이제는 당당히 말할 수 있으니 좋다”고 말했다. 박경옥씨는 “가방끈이 짧아서 길게 이어보려고 학교에 왔지만 가방끈이 중요한 게 아니라 가방 안에 담긴 내용이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며 “그것은 지식이 아니라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그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곳에서 좋은 친구들을 한꺼번에 얻은 게 최고의 자랑이라고 입을 모았다. 최재서씨는 “학생들끼리 동병상련의 공감대가 형성돼 있어서 서로를 이해하는 속도가 굉장히 빠르고 서로에 대한 믿음도 깊다”고 말했다. 고지환씨는 “중학교에 입학해 50년 만에 ‘선생님’을 불러보는데 가슴이 얼마나 울렁거리던지, 나를 가르쳐주는 은사님뿐만 아니라 공부를 매개로 이렇게 많은 친구들과 동창회도 생기니 말로 표현할 수 없이 감개무량하다”고 말했다.

이들 다섯명은 모두 대학 진학의 꿈을 안고 있다. 박경옥씨는 국문학을 공부해 등단의 꿈을 이어나가려 한다. 이순숙씨는 미술을 전공해 미술치료사로서 제2의 인생을 꿈꾸고 있다. 고지환씨는 “원래는 대학까지 갈 생각은 없었는데 공부를 하다 보니 조경학을 전공해야겠다는 목표가 생겼다”면서 “나에게 고등학교는 ‘암스트롱의 달나라’처럼 미지의 세계였는데 내 인생에 한 획을 긋는 일이 됐다”며 웃었다.

지도를 맡은 최인영 교사 역시 “초등학교만 다녀서 평생 공부에 갈망이 컸던 어머니 생각에 방통고 국어교사를 자원하게 됐다”고 했다. 시집의 제목이 ‘백 마디 고마움’인 이유에 대해 그는 “학생들 대부분이 뒤늦게마다 학교에 다닐 수 있어서 정말 고맙다는 말을 많이 해서 그 마음을 한데 모아서 제목으로 달게 됐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다섯명의 만학도들은 인터뷰 내내 “지금이 인생에서 최고로 행복한 시기”라며 학교와 동기들, 선생님들에 대한 감사를 끝없이 표현했다. 시집의 인세는 유네스코한국위원회에 기부하기로 했다.

김아리 객원기자 a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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