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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서울의 한 대학에 외국인 전형으로 합격해 23학번 새내기가 된 미얀마 난민 ㄱ씨는 하마터면 서류 지원조차 못 할 뻔했다. 대학에서 입학지원서와 함께 3000만원의 예금잔고증명서를 요구해 목돈을 구하느라 애를 먹었기 때문이다.
잔고증명서는 외국인 유학생이 한국에 머무르며 대학에 다닐 수 있는 재정적 능력이 있다는 걸 입증하기 위해 제출하는 서류다. 하지만 정부로부터 난민 지위를 인정받은 ㄱ씨는 가족이 전부 한국에 살면서 경제활동 중이고, 영주권 신청 자격까지 있어 상황이 확연히 다르다. 전문가들은 이미 안정된 체류 자격을 가진 난민인정자들에게 체류 능력 검증 목적의 입증 서류를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지적한다.
10일 <한겨레> 취재를 종합하면 외국인 유학생 수가 많은 대학 14곳 중 외국인 전형에 지원한 난민인정자에게 ‘재정능력 입증 서류'를 요구하는 곳은 고려대, 경희대, 숭실대, 서울시립대, 한국외국어대 등 5곳이다.
이들 대학의 외국인 전형에 지원하려는 난민인정자는 본인 또는 부모 명의로 된 미화 2만달러(한화 2643만원) 이상의 잔고증명서를 제출해야 한다. 지난해 난민인정자의 대학 입시를 도운 고아무개씨는 “일부 대학에서는 난민인정자라는 점을 고려해 부동산 등기부등본이나 전세보증금 서류 같은 것들을 대체 서류로 인정해주기도 했지만 예외 없이 수천만원의 통장 잔고 증명서를 제출하라는 곳도 있다”며 “난민인정자들은 대입 서류를 준비하는 것에서부터 큰 어려움을 겪는다”고 말했다.
이들 대학의 잔고증명서 제출 요구는 법무부의 ‘외국인유학생 사증(비자)발급 및 체류관리 지침’을 준용한 것이다. 법무부는 외국인 유학생들이 학비, 생활비 등을 마련하지 못해 미등록 체류자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 유학비자(D-2) 발급 시 2만달러 이상의 재정능력 입증을 요구하고 있다. 2만달러는 대학 등록금를 비롯해 주거비와 생활비 등의 체재비 일체를 포함해 산정한 금액이다.
하지만 난민인정자는 정부로부터 장기 거주 비자(F-2)를 발급받아 사실상 영구적인 거주 권리가 보장된 상태다. 장기 거주 비자는 영주권 취득을 목적으로 국내에 장기체류하는 외국인들에게 발급되는 것으로, 체류 기간에 제한이 있는 유학비자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미등록 체류 가능성이 의심돼 재정능력 입증을 요구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건국대, 서강대, 서울대, 성균관대 , 인하대, 우송대, 연세대, 중앙대, 한양대 등의 대학들은 유학비자 발급이 필요한 외국인 유학생에게만 재정입증 서류를 제출토록 한다.
난민 전문가인 김사강 이주와 인권연구소 연구위원은 “난민인정자에게 발급된 에프투 비자는 외국인 유학생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하고, 굉장한 애를 써야 받을 수 있는 안정된 체류 자격”이라며 “국내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닌 난민인정자들이 대학에 들어간다고 갑자기 체류 자격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유학비자를 신청할 이유는 더더욱 없는데 재정능력 입증 서류를 요구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당국이 보완 지침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난민인정자들이 난민법상 한국 국민과 같은 수준의 사회보장을 받는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김 연구위원은 “극단적인 예지만, 기초수급권자인 난민인정자가 대학 입시를 위해 수천만원을 통장에 넣었다 수급 심사에서 탈락해 가족 전체의 생계가 위협받는 일이 있을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심우삼 기자
wu32@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