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일제 강제동원 피해 익산서 첫 현장조사 하루 12시간 고통스런 노동…도망치다 잡히면 채찍세례 “동료들이 도망갔다가 잡히면 팬티만 입힌 채 채찍으로 무지막지하게 때리곤 했습니다. 그러나 노예 같은 생활이 힘들어 죽음을 각오하고 탈출했습니다. 지금도 뉴스에 탄광소식만 나오면 몸서리가 쳐집니다.” 21일 오후 3시께 전북 익산시 황등면 율촌리 조용섭(81)씨의 집.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진상규명위원회 조사반 1팀이 일제 때 노무자로 동원된 뒤 생존자로 남은 조씨를 찾았다. 이날 조사는 진상규명위가 피해 신청을 받은 뒤 처음 벌인 현장조사로 30여명의 취재진이 몰리는 등 눈길을 끌었다. 옛 전남 여천군 출신인 조씨는 일제 강점기인 1942년 11월 당시 마을 이장의 감언이설에 속아 일본 규슈 지방의 한 탄광으로 끌려갔다. 그 해는 심각한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부족했다고 한다. 그는 왼쪽 발목에 난 깊은 상처를 가리키며 고통으로 점철된 악몽을 되새겼다. 당시 탄광에서 화약을 터뜨린다고 해서 황급히 피하던 중 폭약선에 발목이 걸려 넘어지면서 크게 다쳤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 피부이식 수술을 해 겉으로는 나았으나, 피가 잘 통하지 않는 등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걸을 때도 지팡이에 의존하고 있다. 조씨는 “하도 배가 고파 점심 도시락을 갱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먹는 경우가 허다했다”며 “새벽 6시부터 저녁 6시까지 하루 12시간씩 일하는 등 고통스런 생활을 반복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일제가 2년6개월이 지나면 고향에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어긴 채 월급도 제대로 주지 않고 일만 시키자 45년 5월께 고향 친구와 함께 죽음을 무릅쓰고 도망쳤다고 덧붙였다. 그는 “지난 60년대 피해자 중 일부가 30만원씩 돈을 받았으나, 나는 치료비는 물론 어떤 보상도 받지 못했다”며 “정부는 제대로 조사를 벌여 피해자들이 죽기 전에 보상해줘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조사반 10명은 각각 두 팀으로 나눠 조씨를 비롯해 조동국(88), 한형석(85), 임득규(84)씨 등 피해자 4명의 증언을 들었다. 올해 ‘미수’로 가장 나이가 많은 조동국씨는 난청이어서 가족들의 도움을 받는 등 의사 소통에 어려움을 겪었다. 조사2팀은 이날 황등면 죽촌리 화농마을 경로당을 방문해 한씨와 임씨 등으로부터 증언을 들었다. 조사팀은 이들의 증언을 일일이 캠코더로 녹화했다. 임씨는 “남태평양 남양군도에 잡혀가서 비행장과 부두에서 하역일을 했는데, 말라리아에 걸려 죽을뻔 했다”며 “배가 고파 풀을 뜯어 죽을 쑤어 먹기도 했다”고 말했다. 한혜진 팀장은 “동원 피해 신고서가 접수됐으나 자료가 미비해 사실 보완을 위해 직접 현장을 방문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조사팀은 “전북 익산시를 첫 방문지로 택한 것은 증언이 가능한 70~80대 생존자 다수가 이곳에 거주하고, 연행된 내용이 비교적 다양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조사단은 22~23일 익산시의 또다른 피해자 9명에 대해 조사를 벌인다. 익산/박임근 기자 pik007@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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