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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5일 별세 신창균 선생, 독립·통일 가시밭길 온몸으로 헤치다

등록 2005-03-06 19:23수정 2005-03-06 19:23

1948년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한 한독당 대표들이 평양 대동강변 부벽루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맨 오른쪽이 신창균 선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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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한 한독당 대표들이 평양 대동강변 부벽루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맨 오른쪽이 신창균 선생이다. \\
5일 별세한 신창균 선생의 삶은 독립운동과 통일운동의 역사 그 자체다. 신 선생이 90살 때 낸 회고록 〈가시밭길에서도 느끼는 행복〉의 제목처럼 독립운동과 통일운동에 앞장선 선생의 앞에는 가시밭길이 펼쳐졌다.

1908년 충북 영동에서 태어난 신창균 선생이 열두 살 때 3·1 운동이 일어났다. 만세를 부르고 일본 경찰 주재소를 파괴하던 신 선생은 일본 헌병에 붙잡혔지만, 나이가 어려서 매만 맞고 풀려났다. 이때 선생의 내면에 뿌리내린 민족자존 의식이 한평생 독립운동과 통일운동으로 이어졌다.

그는 국내에서 항일운동을 하다가 일제의 감시를 피해 40년 6월 중국으로 망명했다. 신 선생은 마카오에서 사업에 성공해 탄탄한 재력을 갖춘 뒤, 임시정부 마카오 연락책을 맡았다.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보내고, 중국의 일본군 동태를 보고했다.

생전에 신 선생은 ‘백범의 정신적 정통성을 이었다’고 자부했을 만큼, 백범을 흠모하고 통일 유업을 계승하려고 노력했다. 단독 정부 수립을 둘러싼 논란이 벌어지던 해방 후 정국에서 신 선생은 ‘남북 통일이 없으면 우리 민족은 진정한 독립을 이룬 것이 아니다’라는 백범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광복 뒤 조선 최대의 성냥 회사를 경영해 남한에서 몇 손가락에 안에 꼽힐 정도로 부자였던 신 선생은 백범이 당수로 있던 한국독립당(한독당)의 중앙집행위원 및 재정부장을 맡았다. 1948년 4월 신 선생은 단독정부 수립을 저지하기 위한 남북협상을 위해 백범과 함께 평양을 방문하기도 했다.

신 선생은 백범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이승만 정권에게 사업체를 빼앗기고 정치 활동이 묶이는 등 가시밭길을 걸었다. 그는 평화통일정책에서 백범을 계승한 죽산 조봉암을 도와 진보당 재정위원장을 맡았다. 1959년 7월 ‘진보당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른 그는 1961년 5·16 군사 쿠데타가 발발하자 혁신계 인사로 분류돼 다시 수감됐다. 이후 선생은 반독재와 통일운동의 길을 걸었다.

그는 80년대와 90년대에 조국통일범민족연합 활동 등을 통해 각종 집회와 시위에 빠짐없이 참석하는 등 민간통일운동의 맨 앞자리를 지켜왔다. 그는 2003년 12월 공개유언에서 ‘하루 빨리 통일을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신 선생은 제7회 늦봄통일상과 제1회 백범통일상을 받기도 했다.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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