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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김광석 교수 “이태백도 ‘발해를 외국으로’ 취급했다” 주장

등록 2006-09-18 09:31수정 2006-09-18 09:59

발해가 새로 창제한 문자 발해가 독자적으로 사용한 신문자. (홍콩=연합뉴스)
발해가 새로 창제한 문자 발해가 독자적으로 사용한 신문자. (홍콩=연합뉴스)
동북공정 근거사료도 “대조영은 고구려 별종”
발해 나라명에 `國' 사용은 자주독립 공동체 뜻
독자적 신문자 사용.고구려 풍속 그대로 이어
홍콩의 발해사 학자인 김광석(金光錫.62) 홍콩 능인(能仁)서원 한국학과 교수는 중국의 발해사 편입 시도는 중화 패권주의에 다름아니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 교수는 지난 91년 홍콩에서 `발해족의 형성과 그 사회형태 연구'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으면서 해외 학계에서 처음 발해사 연구로 인정받은 한국학자다.

김 교수는 18일 그간 한국에 공개되지 않았던 이 논문을 토대로 그간의 남.북한, 중국, 일본, 러시아 등의 발해 사료 및 연구결과를 집대성해 발해사가 중국사가 아니라는 근거를 조목조목 짚었다.

◇ 말갈은 고대 한민족 = 말갈족은 북방 이민족이 아닌 우리 한민족의 일원으로 고구려 유민들과 함께 발해를 건국한 주도세력이었다.

발해가 건국되던 6세기말 7세기초 시기에 지린(吉林)성 등 동북지방에 7개 말갈족 부족이 있었다. 한민족의 원류인 북방 예맥계가 3개 부족, 고아시아 숙신계가 4개 부족이었고 숙신계 흑수말갈을 제외한 6개 부족이 발해에 흡수됐다.

김 교수는 "`말갈(靺鞨)'이라는 부족명은 중국이 이민족을 경시해 붙여준 명칭"이라며 "우리에겐 백제와 신라를 침략한, 문화수준도 낮고 야만적인 이미지를 풍기고 있지만 사실은 고대 한민족의 하나"라고 주장했다.

말갈족 가운데 가장 남쪽에 있었던 예맥계 속말말갈이 발해 건국의 주체가 됐는데 속말수(粟末水.지금의 제2쑹화강)에서 유래된 속말말갈은 부여 계통으로 고구려와 혈연, 지역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우수한 철기문화를 자랑했다. 삼국시대에도 고구려는 오히려 말갈부족과 연합해 신라와 백제를 공격하는 일이 잦았다.

고구려 멸망후엔 고구려 유민들이 속말말갈 사회로 쏟아져 들어오면서 발전의 계기를 맞았다. 속말말갈 외에 동옥저, 남옥저의 후예인 백산(白山) 말갈도 역시 예맥계로 발해 건국에 참여했다.


헤이룽장(黑龍江) 일대에 근거지를 둔 흑수말갈은 발해에 복속되지 않은채 발해와 군신관계를 유지하다 여진족에게 흡수돼 후에 여진족의 나라 금, 청나라의 주도세력이 됐다.

◇ 대조영도 고구려계 =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은 속말말갈 부족장 걸걸중상(乞乞仲象)의 아들로 당시 고구려 영토에서 살던 고구려 유장이었다.

중국이 발해사에 대한 동북공정의 근거사료로 쓰는 구당서(舊唐書)에도 "대조영은 본래 고구려 별종(大祚榮者, 本高麗別種)"으로, 신당서(新唐書)엔 "고구려에 붙어있던 속말말갈 사람으로 성은 대씨이다(粟末靺鞨附高麗者, 姓大氏)"로 기술돼 있다.

고구려 멸망후 영주(營州.지금의 랴오닝 차오양(朝陽) 일대)에 강제 이주된 고구려 유민과 속말말갈은 거란족과 함께 도독의 잔혹한 통치에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 당의 여제 무즉천은 이들 반당(反唐) 세력을 이간질시키기 위해 걸사비우를 허국공(許國公)에, 걸걸중상을 진국공(震國公)에 봉했다. 속말말갈은 이전부터 자신을 진국으로 칭해왔다.

책봉을 거부하고 당군과 맞서 싸우던 말갈 추장 걸사비우(乞四比羽)가 전사하고 걸걸중상도 사망하자 걸걸중상의 태자 대조영은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 당군의 추격을 물리치고 고구려, 말갈 세력을 규합해가며 실력을 키웠다.

697년 대조영은 동모산(東牟山)에 성을 쌓고 스스로 진국왕(震國王)이 됐으며 713년엔 발해로 개칭했다.

◇ 발해 지배층 예맥계가 주류 = 발해 건국 초기의 인구는 78만명에 불과했으나 고구려 유민을 지속적으로 흡수하고 거란족 190만명과 여진족 60만명을 직접 통치하게 됨에 따라 전성기 시절 인구는 300만명으로 늘어났다.

발해사회 지배계급의 주체는 예맥계 속말말갈 대 씨 왕족과 고구려 귀족관료 출신인 고 씨, 말갈 각 부족 추장, 일부 한족 지주들이었다. 중국 학자가 쓴 발해국지장편(渤海國誌長編)엔 발해 지배계급은 모두 317명이었는데 대 씨 90명, 고 씨 56명, 장 씨 30명, 왕 씨 22명, 리 씨 18명 등으로 속말말갈과 고구려가 주축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드물게 눈에 띄는 박 씨와 최 씨도 신라계나 고구려계일 가능성이 있다.

◇ 이태백도 "발해는 외국" = 당나라 사람들은 당시 발해를 어떻게 인식했을까.

발해는 당시 나라명에 `국(國)'을 사용했다. 이는 자주독립 공동체였다는 의미이다. 당시 발해문자에 능통해 발해 외교문서의 번역을 맡기도 했던 시선(詩仙) 이백(李白)도 발해를 고려(고구려의 의미)나 백제로 부르며 외국으로 취급했다는 기록이 이백의 시문집 옥록총담(玉록<鹿+土>叢談)에 기록돼 있다.

이백의 혁만서(하<口+赫>蠻書)에선 또 당나라 사람들이 발해를 습관적으로 고려, 백제로 칭했다는 말이 나온다.

특히 발해가 독자적인 신문자를 사용했다는 점은 어느 나라에도 예속되지 않은 자주성을 갖춘 국가였다는 점을 보여준다.

발해가 한자를 사용하긴 했지만 한글의 원형이라는 알려진 가림다(加臨多)와 유사한 글자를 별도로 만들어 사용했을 정도로 문자 사용에선 중원왕조와는 이질적이었다. 단군 고조선 시대의 석각도 발해문자 창제에 참고가 됐을 것이라고 김 교수는 주장했다.

이와 함께 지배계급인 예맥계 고구려와 속말말갈은 북방 몽골어계통 언어를 사용, 의사소통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김 교수는 또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발해의 토장(土葬) 매장방식이나 제사, 전설, 가무 등을 비춰볼 때 고구려의 풍속을 그대로 이어받은 자주국이었다고 논박했다.

◇당나라와 전쟁도 불사 = 고왕 대조영에 이어 2대 무왕 대무운(大武芸)은 인근 부족을 정벌, 인안(仁安)을 독자연호로 채택하고 정권을 공고히 한 다음 당 현종이 아직까지 복속치 않았던 흑수말갈 지역에 흑수도독부를 두자 즉각 토벌에 나섰다.

발해가 출격에 나서자 당은 신라로 하여금 발해를 공격토록 했고 이로인해 신라와는 줄곧 긴장관계에 놓이게 됐다. 대무운은 당으로 망명 투항한 형 대문운(大門芸)을 살해하려 낙양에 자객을 보내는 등 당과는 갈등 관계에 있었다. .

대흠무(大欽茂)가 3대 문왕으로 등극하면서 발해는 당시의 최강국 당과의 화평외교에 힘쓰면서 내치 개혁에 주력했다. 762년 당은 발해를 나라(國)로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김 교수는 "발해는 계속 독자적 연호를 사용했고 34차례에 걸쳐 일본에 외교사절을 파견했으며 또 당나라와 자주 전쟁을 벌인 점은 독립 주권국가라는 사실을 말해주기에 족하다"고 말했다.

책봉, 조공, 수작(受爵)은 당시 강대국에 대한 외교방식의 하나였고 당나라식 행정제도 도입은 중원의 선진문화를 흡수한 것일 뿐 이를 당나라에 예속된 일개 지방정권으로 해석하는 것은 억지라는 것이다.

◇`동거란'이 발해 계승 = 10세기초 발해는 귀족 권력투쟁과 국정 불안으로 사회모순이 커지면서 925년 거란의 야율 아보기(耶律 阿保機)의 침략을 초래한다.

1년만에 홀한성(忽汗城)이 함락되고 애왕(哀王)이 투항함으로써 발해는 229년만에 역사에 종언을 고했다. 고구려계인 고영창(高永昌) 등에 의한 발해 부흥운동이 세차례 있었으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아보기는 그러나 곧바로 발해국 영토에 동단국(東丹國)을 세우고 태자를 인황왕(仁皇王)으로 앉히며 발해국 계승을 선언했다.

당시 발해 유민 300만명중 190만명은 동단국에서 거란의 직접 통치를 받았고 나머지 110만명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중 10만여명은 고려로 넘어갔고 60만명은 여진으로 도피했으며 1만명은 일본으로 망명하기도 했다.

왕족 2명, 귀족 25명을 포함 발해 유민이 대거 고려로 들어오자 고려는 이들을 후대했다. 고려 태조 왕건은 "발해는 본래 우리의 친척 국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김 교수는 "동단국은 이후 동거란으로 국명을 바꾸면서도 발해의 행정체제와 규모를 그대로 유지했다"며 사실상 동단국은 발해국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발해는 거란 이후 동북지방의 주도세력이 된 여진과도 특수관계를 맺고 있었다. 흑수말갈이 합류한 여진의 금나라는 당시 동북지구에서 최고 문명을 자랑하던 발해를 대거 포섭해 끌어들였다. 금나라의 역대 황제 가운데 발해족을 생모로 둔 황제는 해릉왕, 세종, 위소왕 등 3명에 이른다.

jooho@yna.co.kr

[인터뷰] 홍콩 발해사 학자 김광석 교수

"발해가 당(唐)나라에 조공, 책봉을 한 것은 당시 전쟁억지를 위한 친선외교의 한 수단이지 이를 예속정권으로 주장하는 것은 중국의 억지입니다"

발해사 연구로 지난 91년 박사학위를 받은 홍콩 능인(能仁)서원 한국학과 김광석(金光錫.62) 교수는 18일 중국의 동북공정이 대중화, 대한족 중심의 영토확장주의 사관에 입각해 발해사를 보고 있다며 심각한 오류를 안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지난 91년 `발해족의 형성과 그 사회형태 연구'라는 중문 논문으로 홍콩 원동(遠東)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으며 해외 학계에서 처음 인정받은 발해사 학자다.

그는 중국이 80년대말에 발해유적 종합발굴 보고서를 펴내는 등 사료 및 자료 축적에도 상당히 공을 들인 상태여서 동북공정을 무조건 일개 학술주장으로 몰아붙여선 한국의 대응에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중국 학계가 발해사를 보는 관점은.

▲중국의 관변학자들은 변증법적 역사유물론의 사관에 입각, 발해사를 연구하기 때문에 열린 사고를 갖기 힘들고 연구에 정치적 편향성을 갖고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소수민족과 이민족의 역사적 활약상을 경시하면서 발해 국정의 독립성과 문화의 자주성을 부인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중국이 발해를 당조에 예속된 영토이자 지방정권으로 보는 것은 한당(漢唐) 제국주의의 발로라고 보는게 맞다. 이미 30년전부터 이런 논리를 뒷받침하는 논문들을 쏟아냈다는 점은 중국이 이 문제에 얼마나 치밀한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미 중국은 지난 90년대초부터 나를 비롯한 한국 역사학자들의 발해유적 답사 신청을 거부하기도 했다.

중국이 동북 역사에 대한 학술적 토론을 환영한다고 하지만 내가 겪거나 들어본 중국의 학술회의는 분조토론 없이 명령식 전달토론으로 진행된다. 외국 학술이론의 세례를 받은 중국 신세대 학자들이 고구려나 발해사에 그나마 개방된 시각을 갖고 있으나 이들은 목소리는 그다지 크지 않다.

--발해사 연구의 상황은.

▲발해사 연구가 실학자 유득공의 남북국시대론에서 크게 발전치 못한 것은 발해 정사(正史)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발해를 정복한 거란이나 계승한 고려가 발해 역사서를 남겼어야 했는데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중국은 당시 패자의 입장에서 기술한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등 중화사관 중심의 사서를 기초로 동북공정을 펴고 있다.

중국은 이미 70년대말부터 중국에서 발해사를 중국사로 편입시키려는 학술논문이 구시학간(求是學刊), 북방문물(北方文物), 사회과학전선, 학습과 탐색 등 중국 논문집을 통해 수백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중국이 발해를 당의 예속국이라고 주장하는데.

▲발해는 현재 남.북한을 합한 영토의 7배이자 남한의 17배나 되는 영토를 보유하고 있었고 패망한 고구려의 영토를 온전히 차지했다.

발해는 자국의 정치조직과 대외정치에 대한 독자적 방안을 갖고 있었고 자기문자와 연호, 공동체적 감정을 갖고 있었다는 점은 고대 자주국가의 하나로 보기에 족하다. 발해가 당에 조공을 하고 책봉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당시 동북아 정세논리에서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친선외교의 한 수단이었을 뿐이다. 당시 당나라에서도 발해는 예속된 지방정권이 아니라 독립된 외국으로 간주했다는 기록이 여러곳에서 나온다.

--발해 건국자 대조영에 대해선 의견이 나뉘는데.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은 두만강 상류 우수리강 하류에서 살던 속말말갈의 지도자로 고구려의 유장이었다. 속말말갈은 북방 예맥계 부족으로 고대 한민족의 원형이기도 했다. 따라서 대조영을 우리 조상으로 봐도 무방하다.

고구려 멸망후 발해정치를 주도한 지배계층은 대략 310명 가량인데 이 가운데 속말말갈 왕족인 대(大) 씨 90여명을 빼고는 고구려계인 고(高) 씨가 56명으로 가장 많았다.

정주호 특파원 jooho@yna.co.kr (홍콩=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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