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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양지마을 15통 홀몸노인들

등록 2006-12-22 07:50

양지마을 15통의 홀몸노인들
양지마을 15통의 홀몸노인들
젊어 고생고생 했는데 이젠 외로움과 긴 싸움
양지마을 한가운데 15통이 있습니다. 기자가 사는 59-11번지에서 바로 길 건너편입니다. 이곳에는 모두 12명의 65살 이상 홀몸노인이 삽니다. 대부분 30만원 안팎의 생계지원을 받습니다. 18~20일 사흘에 걸쳐 이분들을 만났습니다. 두 분은 계속 집을 비워 만날 수 없었습니다.

권판규(68) 할아버지=이 마을에는 “호랑이 담배 필 때부터” 살았습니다. 기관지약을 꼬박꼬박 먹어야 합니다. 다행히 약값은 무료입니다. 청량리 동안교회 학생들이 2주일에 한 번씩 방 청소를 해줍니다. 문 걸어 잠그고 있으면 “죽어도 서너달 뒤에나 발견될까봐” 낮에는 문을 잠그지 않습니다.

안정숙(80) 할머니=교편을 잡았던 남편은 “빨갱이 노릇 하다가 (전쟁 때) 어느 날 옷 갈아입고 집 나가더니” 행방불명입니다. 할머니가 23살 때 일입니다. 그 뒤로는 “닥치는 대로” 일했습니다. 굶기도 많이 굶었습니다. 지금은 전세금 1000만원인 8평 집에 삽니다. 기자가 일어서려고 하자, 눈물을 흘리며 “가지 말라”고 붙잡습니다.

이삼렬(81) 할머니=17살에 남편과 함께 상경했습니다. 자유당 시절 남편을 잃은 뒤 할머니는 “목구녕 하나 살겠다고” 근처 과수원에서 “배·사과 썩은 거” 주워다 팔았습니다. 또 아파트 청소를 69살까지 했습니다. 69살 때부터 매달 32만원 받습니다. 올봄 집주인이 ‘포막’을 쳐주기 전까지는 천장에 비가 샜습니다. 지금도 벽의 두 귀퉁이는 바닥까지 곰팡이가 퍼져 있습니다.

이장순(80) 할머니=병아리 장사를 하면서 두 아들을 키웠습니다. “밥도 못 먹였는데 공부는 어떻게 시켰겠냐”고 반문합니다. 할머니는 “애들한테 죄 지었다”고 말합니다. 왼쪽 다리가 부어 거동이 불편합니다. 1년 이상 다리에 침을 맞았습니다. 갈 때마다 의사가 “괜찮아졌냐”고 묻는데, 나아진 게 없다 보니 “미안해서” 이젠 가지 않습니다.

박사복(75) 할아버지=전쟁 때 인민군 부대를 탈영해 고향에서 반공 유격대 활동을 했습니다. 61년 결혼하고 ‘대한석유공사’에 취직해 70년대 후반에 퇴직했습니다. 자동차용품 제조공장을 운영했는데, 외환위기 때 사업이 망하면서 “알거지”가 됐습니다. 그때 딸과 장애인인 아들과 헤어졌습니다. 아들은 “뜨내기로 살 것 같다”고 합니다. 아내는 2000년 사망했습니다.

김종환(71) 할아버지=개성 출신인 할아버지는 전쟁 뒤 부산에서 직물계통 일을 했습니다. 48살 때 결핵성 늑막염을 앓으면서 이혼했습니다. 동사무소에서 쓰레기 분리수거하는 일을 2003년까지 했습니다. 수급권자가 된 지는 5~6년 됩니다. 부인과 이혼한 뒤 20년 가까이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진남순(77) 할머니=전북 남원 출신인 할머니는 17살 때 결혼해 “첩첩산중”으로 들어갔습니다. 마을 ‘반장’이던 남편이 전쟁 때 인민군 손에 돌아가셨습니다. 이후 “별짓”을 다 했습니다. 빵집, 떡집도 하고, ‘시다’도 했습니다. 겨울에는 기름값 때문에 걱정입니다. 석유 한 통을 20만원에 들여놓아도 한달이면 다 씁니다. 또 뉴타운 개발한다고 이사가라고 할까봐 자나 깨나 걱정입니다. “그나마 여름에는 공원에서 여기 앉았다가 저기 앉았다가 하는데” 겨울엔 방에 하루 종일 있으니 적막합니다.


이상희(74) 할아버지=전북 정읍에서 40년 전 상경했습니다. 건설 노동일을 계속했습니다. 가장 큰 걱정거리를 묻자 “외로움”이라고 답합니다. 그럴 때마다 돌아다니면서 종이를 수집합니다. 시간 나는 대로 돌아다니면 “소줏값”은 번다고 합니다. 기름값이 너무 비싸 겨울에는 밤에만 보일러를 틉니다.

문옥례(76) 할머니=경기 용인에서 남편과 기성복 장사를 하다 36년 전 사업이 망해 양지마을로 넘어왔습니다. 그 뒤로 남편은 건설 노동일을 하다 지난해 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심심할 때마다 골목 끝 구멍가게에 가 사람들과 어울리지만, “집에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서 적적하다”고 말합니다.

이아무개(70) 할머니=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14살 때부터 엿을 팔아 어머니와 장애인인 언니를 먹여살렸습니다. 27살 때 시집을 갔습니다. 남편은 노동일을 했는데, “벌면 먹고, 안 벌어다주면 말고” 했습니다. 채소·과일 장사 등을 하면서 두 딸을 키웠습니다. 두 딸 모두 결혼했는데 “저 살기 바빠서”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아는 사람들 볼까봐” 사진 촬영은 거절했습니다.

김기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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