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수 연세대 법대 교수
[배심제지지 릴레이편지4] 이종수 연세대 법대 교수
이 편지는 국민의 사법참여를 위한 국민참여재판의 이해를 돕고 관련 법안의 도입을 바라는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소장 : 한상희, 건국대 교수)가, 국회 법사위원들에게 보내는 ‘국민참여재판-선택이 아닌 필수입니다’ 릴레이 편지 제4호 입니다.
안녕하십니까? 민주당 조순형 의원님.
저는 대학에서 헌법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일을 생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평소 의원님 특유의 직설적인 사법비판에 많은 대목에서 공감대를 함께 형성해온 한 시민이기도 합니다.
그간 사법개혁에 관한 사회적 공론화작업이 상당히 진행되어 왔고, 현재 이에 관한 국민적 공감대가 어느 정도 폭넓게 형성되어 있다고 저 개인적으로 판단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입법화에 있어서 여러 쟁점들로 인해 다소 어려움에 봉착해 있는 듯싶습니다. 특히 국민의 사법참여, 즉 배심제 내지 참심제의 도입과 관련해서 국회 내의 논의과정에서 그 위헌여부가 논란인 듯하여 이에 관한 저의 생각을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사법부의 신뢰위기가 불거져 있습니다.
얼마 전에 현직 판사가 담당사건의 소송당사자였던 전직 대학교수로부터 테러를 당하는 유감스러운 일로 인해 사회적으로 큰 물의와 논쟁이 빚어진 바가 있습니다. 테러는 분명히 잘못된 일이지만 판결의 공정성과 사회적 수락가능성의 측면에서 이를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하는 중요한 계기이기도 했습니다. 예전부터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우리 사회 안의 상대적 소외계층으로부터 자주 회자되어 왔지만, 이번 사건은 명문대를 나온 전직 대학교수였던 우리 사회의 최고엘리트인 한 시민이 사법부를 상대로 온 몸을 내던졌다는 사실에서 그 사회적 파장이 자못 커 보입니다. 이는 그만큼 사법부가 국민으로부터의 신뢰위기에 직면해 있는 중요한 반증이기도 하고, 이용훈 대법원장께서 취임이후에 줄곧 사법부의 신뢰회복을 강조해온 것과도 그 궤를 같이 한다고 보입니다. 사법부는 주권자인 국민으로부터 결코 독립되어 있지 않습니다.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에서 사법부는 권력기관이라기보다는 사법기능, 즉 재판기능을 담당하는 중립적인(‘비정치적’이라는 의미에서) 기구쯤으로 인식되어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사실 시민의 재산과 자유의 박탈 여부가 법원의 판결로써 최종적으로 확정된다는 점에서 볼 때 사법기능이 가장 직접적인 국가공권력의 행사임에도 말입니다. 이러한 사회적 인식에는 과거 오랜 군사권위주의 정권 하에서 사법부가 집행권력과 입법권력과 같은 타 국가권력을 견제하는 데에 실패함으로써, 즉 이른바 ‘권력의 시녀’란 말로 상징되듯이 국가권력으로서의 위상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데에 주된 원인이 있었다고 보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그간 사법부가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기울인 노력도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법부의 이 같은 노력이 타 국가권력으로부터의 독립 자체를 의도한 것이었을 뿐 진정 국민을 위한 공정한 재판기능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는지는 의문입니다. 흔히들 사법부의 독립성 내지 재판의 독립성을 말하지만 이는 다른 국가기관으로부터의 독립성을 말하는 것이지 결코 주권자인 국민으로부터의 독립성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국민주권주의 하에서 여느 국가기관과 마찬가지로 사법부 역시 결코 국민으로부터 독립될 수 없습니다. 독일에서 법원의 모든 판결문이 ‘국민의 이름으로(Im Namen des Volkes)'라는 머리말로 시작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기도 합니다. 사법권력은 국민주권주의 하의 권력분립원리에 따라 마련된 국가권력입니다. 또한 모든 국가권력에는 마땅히 주권자인 국민의 민주적 통제가 요구됨이 국민주권주의의 기본원칙입니다. 집행권력이나 입법권력의 경우에는 그 권력담당자가 주기적으로 실시되는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서 선출되고, 또한 선거를 통해서 권력행사의 정당성에 관한 정치적 책임을 묻는 제도적 장치가 확보되어 있는 반면에, 사법권력은 그 구성에 있어서나 당해 권력의 행사에 있어서 주권자인 국민의 민주적 정당성에 의해서 통제될 수 있는 최소한의 제도적인 장치조차 결여되어왔습니다. 이러한 민주적 정당성의 결핍이 결국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서 사법권력이 다른 국가권력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때로 정치적 역학관계에 의해서 재판의 공정성이 확보되지 못하는 구조적인 취약점으로 작용해 왔다고 봅니다. 국민의 사법참여는 사법부의 기능 강화 그렇기 때문에 국민의 사법참여는 사법권력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법권력을 강화하고 진정한 국민의 사법부로 거듭나게 하는 중요한 계기인 셈입니다. 법률전문가로서 신분이 독립된 법관이 재판을 전담해야만 재판의 공정성이 확보된다는 명제는 하나의 가설에 불과합니다. 이 가설은 그간 수십 년에 걸친 우리 현대사의 질곡 속에서 실제 그다지 긍정적으로 평가되지 못했기도 하지만,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포함한 정무직 공무원을 별다른 직업(소양)적 전제조건 없이 단지 선거나 기타의 정치적 과정을 통해서 임명하고 이들에게 집행권력과 입법권력의 행사를 담당케 하는 것이 민주주의 원리의 작동기제이듯이 사법권력 역시 민주주의 원리를 극단적으로 적용한다면 미국의 경우에서와 같이 주민 내지 시민들이 선거로 그 담당자, 즉 법관을 선출케 하는 것도 하나의 가능한 대안이 됩니다. 우리의 경우 국민주권주의 하에서 예외적으로 국민에 의해서 통제되지 않는 권력으로서의 사법권력이 결국 다른 국가권력에 종속된 약화된 모습 속에서 정작 주권자인 국민과는 절연된 기형적인 사법엘리트주의로 귀결되어왔다고 봅니다. 법관직의 전문성은 오래된 편견에 불과합니다. 법관직의 전문성에 관한 사항은 국민의 사법참여를 저어케 하는 주요 요인으로, 이는 우리 사회에서 시민들의 의식 깊숙한 곳에 합리성을 가장해서 고정관념으로 자리 잡고 있는 대단히 완고한 심리학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단지 선거를 통해서 대부분 법률전문가가 아닌 국회의원들로 입법부가 구성되고, 오히려 법률전문가인 전문위원 등이 입법보조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입법부에서의 실례에서와 같이 사법부의 구성도 그렇게 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주권자인 국민의 사법참여를 사법권력에 대한 간섭 내지는 재판의 공정성에 대한 훼손으로 폄훼하는 것은 결국 국민주권주의와 민주주의 원리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에 다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게다가 현대사회의 분업화는 점점 더 복잡하고 난해한 생활관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법적 분쟁이라는 것이 대부분 이러한 복잡한 생활관계로부터 빚어지고 있기도 하고, 사법적 판단에 있어서 때로는 사회상규와 같은 국민의 건전한 보편적 상식이 요구되기도 합니다. 단지 법률전문가일 뿐이지 복잡한 생활관계에 대해서는 여느 문외한과 다름이 없는 직업법관이 재판과정에서 이 모든 사항을 고려하여 올바른 판결을 내린다는 것이 어렵고 벅차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판결의 사회적 수락가능성 또한 제대로 확보되기가 어려운 시점입니다. 따라서 국민의 사법참여는 직업법관의 과도한 부담을 덜어줄 뿐만 아니라 해당 생활관계의 전문가인 일반시민이 재판과정에 참여함으로써 판결의 공정성과 사회적 수락가능성을 높이는 기제이기도 합니다. 배심제와 참심제 이러한 맥락에서 미국을 포함한 영미권에서는 주로 배심제도가 그리고 독일을 포함한 유럽대륙의 다수 나라들에서는 참심제도가 국민의 사법참여를 위한 제도적 장치로 확보되어 운용되고 있습니다. 이들 나라들에서 시민사회의 형성과정과 헌법국가 성립의 상이한 조건들에 따라 각기 다소 다른 양상들을 보이기는 하지만, 공통점은 어떠한 형식으로든 주권자인 국민 내지 일반시민이 사법과정에 참여하는 통로를 열어놓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잘 알고 계시듯이 배심제도는 일반시민들 가운데 무작위로 선정된 비법률가인 배심원들이 시민의 대표 내지 보편성의 대표로서 법적 분쟁의 사실판단을 함으로써 국가의 재판권에 참여하고 직업법관은 이러한 배심원단의 사실판단에 기속되어 양형 등의 법적 판단을 행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참심제도는 배심제도와는 달리 일반시민들 가운데서 선정된 참심원(명예법관)들이 일정한 제한된 임기동안 직업법관과 함께 하나의 합의체 재판부를 구성하여 직업법관과 동등한 지위에서 동등한 권한을 가지고서 재판의 전 과정을 수행하는 제도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국민의 사법참여는 시민의 권리이자 동시에 의무이기도 합니다. 주권자인 국민의 사법참여가 왜 위헌이겠습니까? 그간 국내 헌법학계에서는 현행 헌법 하에서 일반시민이 배심원으로서 법적 판단이 아닌 사실판단만을 담당하는 배심제도의 도입은 허용되지만, 일반시민이 직업법관과 동등하게 사실판단뿐만 아니라 법적 판단까지 행하는 참심제도의 도입은 허용되지 않고 이를 헌법개정사항으로 보는 것이 다수학자들의 견해였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사실은 배심제도를 취하는 미국의 경우에 연방헌법과 수정헌법에 배심제에 관한 명문의 규정을 두고 있는 반면에, 독일의 경우에 치밀한 법이론적 체계를 유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방헌법인 기본법에 아무런 명문의 규정이 없이 단지 법원조직법상의 규정만으로 참심제를 취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결국 배심제가 되었건 참심제가 되었건 간에 주권자인 국민 내지 일반시민이 국가권력인 사법권력의 행사에 참여하는 제도적인 장치가 마련되는 것이 국민주권주의원리에 의해서 정당화되고 또한 요청된다는 사실입니다. 배심제 내지 참심제의 도입과 관련하여 논란되는 쟁점이 우리 헌법 제27조 제1항에서 규정하고 있는 ‘헌법과 법률이 정한 법관에 의한 재판을 받을 권리’와의 저촉여부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헌법 제101조에서 제1항은 “사법권은 법관으로 구성된 법원에 속한다.” 그리고 제3항은 “법관의 자격은 법률로 정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헌법 제103조에서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고 정하고 있습니다. 즉 헌법은 법관의 기능과 관할에 대해서 규정하고 있을 뿐이지 헌법전 어디에도 변호사자격을 가진 법률전문가에게만 법관직을 맡긴다는 명문의 규정이 없습니다. 이는 단지 법원조직법에서 규정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참심제 도입과 관련하여 독일에서의 기본법 해석에서와 같이 헌법규정상의 ‘법관’개념에는 원칙적으로 직업법관과 비직업법관(명예법관) 양자 모두가 포함되고, 제104조 이하 규정에서의 ‘법관’개념에는 협의의 직업법관만 포함되는 것으로 해석할 합헌적 해석의 여지가 충분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즉 헌법개정이 없이도 현행 헌법 하에서 배심제도 내지 참심제도의 도입이 가능하다는 게지요. 어쨌든 제기되는 위헌논란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는 헌법개정을 통해서 국민의 사법참여에 관한 명문의 규정을 헌법전에 삽입하는 것이 가장 타당한 방법이겠지만, 최근에 다시 개헌이 사회 내에서 논란되고 있듯이 그것이 결코 용이한 작업이 아니기에 이를 마냥 미루고만 있는 것도 마땅한 태도는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배심제 내지 참심제 도입에 관해서 제가 앞에서 피력한 현행 헌법 하에서의 합헌적 해석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작년에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가 입안한 ‘국민의 형사재판참여에 관한 법률안’에 따르면 국민참여재판의 적용여부에 관해서 피고인의 의사를 존중하여 피고인의 적극적인 동의가 있는 경우에만 적용토록 하고, 배심원단의 평결에 대해서 법원이 이에 직접적으로 기속되지 않는 권고적 효력만을 부여하는 등으로 현행 헌법 하에서 제도 도입과 관련한 위헌성의 논란을 불식시키기 위해서 세심하게 배려한 여러 노력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선 제도 도입의 필요성이 그만큼 강하다는 것이겠지요. 우리 모두가 진정한 재판관이 될 수 있습니다. 지혜로운 명판결로 인구에 회자되는 솔로몬왕이 직업법관이 아니었듯이 독일의 극작가인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d Brecht)의 희곡 <코커서스의 분필원(Der kaukasische Kreidekr-eis)>에 등장하는 인간적인 재판관인 아츠다크(Azdak) 역시 우리로 치자면 본래 면서기였다가 혁명기에 잠시 인민재판관직을 맡았을 따름입니다. 공교롭게도 두 재판 모두가 아이의 어머니를 확인하는 사건이었고, 전자의 경우가 생모를 찾는 재판이었다면, 후자의 경우는 진정한 어머니를 찾는 재판이었습니다. 또한 헨리 폰다가 주연했었던 ‘12인의 성난 사람들(Twelve Angry Men)'을 보았던 옛 감동이 아직도 가슴 속에 잔잔한 여운으로 남아있습니다. 가끔씩은 수업 중에 학생들에게 이 영화를 권해보기도 합니다. 이처럼 재판이라는 것이 실체적 진실을 발견하기 위한 제도화된 절차에 불과하다면 그간 우리 사회에서 법관직의 전문성이라는 도그마가 얼마나 큰 괴물이 되어있는지요. 주권자인 국민이 사법과정에 참여하는 것이 왜 위헌이겠습니까? 지극히 당연한 일을 두고서 법관직의 전문성과 재판의 독립성을 내세워 명시적인 헌법적 근거 없이 법관직을 마치 성역화해서 국민의 사법참여를 회피해 온 그간의 법제도가 오히려 위헌이지 않겠습니까! 사족이 길어졌습니다. 모쪼록 앞으로도 의원님의 치열한 의정활동을 기대하면서 글을 맺습니다. 두서없는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종수 드림 (연세대 법대 교수·헌법학)
얼마 전에 현직 판사가 담당사건의 소송당사자였던 전직 대학교수로부터 테러를 당하는 유감스러운 일로 인해 사회적으로 큰 물의와 논쟁이 빚어진 바가 있습니다. 테러는 분명히 잘못된 일이지만 판결의 공정성과 사회적 수락가능성의 측면에서 이를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하는 중요한 계기이기도 했습니다. 예전부터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우리 사회 안의 상대적 소외계층으로부터 자주 회자되어 왔지만, 이번 사건은 명문대를 나온 전직 대학교수였던 우리 사회의 최고엘리트인 한 시민이 사법부를 상대로 온 몸을 내던졌다는 사실에서 그 사회적 파장이 자못 커 보입니다. 이는 그만큼 사법부가 국민으로부터의 신뢰위기에 직면해 있는 중요한 반증이기도 하고, 이용훈 대법원장께서 취임이후에 줄곧 사법부의 신뢰회복을 강조해온 것과도 그 궤를 같이 한다고 보입니다. 사법부는 주권자인 국민으로부터 결코 독립되어 있지 않습니다.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에서 사법부는 권력기관이라기보다는 사법기능, 즉 재판기능을 담당하는 중립적인(‘비정치적’이라는 의미에서) 기구쯤으로 인식되어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사실 시민의 재산과 자유의 박탈 여부가 법원의 판결로써 최종적으로 확정된다는 점에서 볼 때 사법기능이 가장 직접적인 국가공권력의 행사임에도 말입니다. 이러한 사회적 인식에는 과거 오랜 군사권위주의 정권 하에서 사법부가 집행권력과 입법권력과 같은 타 국가권력을 견제하는 데에 실패함으로써, 즉 이른바 ‘권력의 시녀’란 말로 상징되듯이 국가권력으로서의 위상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데에 주된 원인이 있었다고 보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그간 사법부가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기울인 노력도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법부의 이 같은 노력이 타 국가권력으로부터의 독립 자체를 의도한 것이었을 뿐 진정 국민을 위한 공정한 재판기능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는지는 의문입니다. 흔히들 사법부의 독립성 내지 재판의 독립성을 말하지만 이는 다른 국가기관으로부터의 독립성을 말하는 것이지 결코 주권자인 국민으로부터의 독립성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국민주권주의 하에서 여느 국가기관과 마찬가지로 사법부 역시 결코 국민으로부터 독립될 수 없습니다. 독일에서 법원의 모든 판결문이 ‘국민의 이름으로(Im Namen des Volkes)'라는 머리말로 시작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기도 합니다. 사법권력은 국민주권주의 하의 권력분립원리에 따라 마련된 국가권력입니다. 또한 모든 국가권력에는 마땅히 주권자인 국민의 민주적 통제가 요구됨이 국민주권주의의 기본원칙입니다. 집행권력이나 입법권력의 경우에는 그 권력담당자가 주기적으로 실시되는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서 선출되고, 또한 선거를 통해서 권력행사의 정당성에 관한 정치적 책임을 묻는 제도적 장치가 확보되어 있는 반면에, 사법권력은 그 구성에 있어서나 당해 권력의 행사에 있어서 주권자인 국민의 민주적 정당성에 의해서 통제될 수 있는 최소한의 제도적인 장치조차 결여되어왔습니다. 이러한 민주적 정당성의 결핍이 결국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서 사법권력이 다른 국가권력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때로 정치적 역학관계에 의해서 재판의 공정성이 확보되지 못하는 구조적인 취약점으로 작용해 왔다고 봅니다. 국민의 사법참여는 사법부의 기능 강화 그렇기 때문에 국민의 사법참여는 사법권력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법권력을 강화하고 진정한 국민의 사법부로 거듭나게 하는 중요한 계기인 셈입니다. 법률전문가로서 신분이 독립된 법관이 재판을 전담해야만 재판의 공정성이 확보된다는 명제는 하나의 가설에 불과합니다. 이 가설은 그간 수십 년에 걸친 우리 현대사의 질곡 속에서 실제 그다지 긍정적으로 평가되지 못했기도 하지만,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포함한 정무직 공무원을 별다른 직업(소양)적 전제조건 없이 단지 선거나 기타의 정치적 과정을 통해서 임명하고 이들에게 집행권력과 입법권력의 행사를 담당케 하는 것이 민주주의 원리의 작동기제이듯이 사법권력 역시 민주주의 원리를 극단적으로 적용한다면 미국의 경우에서와 같이 주민 내지 시민들이 선거로 그 담당자, 즉 법관을 선출케 하는 것도 하나의 가능한 대안이 됩니다. 우리의 경우 국민주권주의 하에서 예외적으로 국민에 의해서 통제되지 않는 권력으로서의 사법권력이 결국 다른 국가권력에 종속된 약화된 모습 속에서 정작 주권자인 국민과는 절연된 기형적인 사법엘리트주의로 귀결되어왔다고 봅니다. 법관직의 전문성은 오래된 편견에 불과합니다. 법관직의 전문성에 관한 사항은 국민의 사법참여를 저어케 하는 주요 요인으로, 이는 우리 사회에서 시민들의 의식 깊숙한 곳에 합리성을 가장해서 고정관념으로 자리 잡고 있는 대단히 완고한 심리학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단지 선거를 통해서 대부분 법률전문가가 아닌 국회의원들로 입법부가 구성되고, 오히려 법률전문가인 전문위원 등이 입법보조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입법부에서의 실례에서와 같이 사법부의 구성도 그렇게 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주권자인 국민의 사법참여를 사법권력에 대한 간섭 내지는 재판의 공정성에 대한 훼손으로 폄훼하는 것은 결국 국민주권주의와 민주주의 원리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에 다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게다가 현대사회의 분업화는 점점 더 복잡하고 난해한 생활관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법적 분쟁이라는 것이 대부분 이러한 복잡한 생활관계로부터 빚어지고 있기도 하고, 사법적 판단에 있어서 때로는 사회상규와 같은 국민의 건전한 보편적 상식이 요구되기도 합니다. 단지 법률전문가일 뿐이지 복잡한 생활관계에 대해서는 여느 문외한과 다름이 없는 직업법관이 재판과정에서 이 모든 사항을 고려하여 올바른 판결을 내린다는 것이 어렵고 벅차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판결의 사회적 수락가능성 또한 제대로 확보되기가 어려운 시점입니다. 따라서 국민의 사법참여는 직업법관의 과도한 부담을 덜어줄 뿐만 아니라 해당 생활관계의 전문가인 일반시민이 재판과정에 참여함으로써 판결의 공정성과 사회적 수락가능성을 높이는 기제이기도 합니다. 배심제와 참심제 이러한 맥락에서 미국을 포함한 영미권에서는 주로 배심제도가 그리고 독일을 포함한 유럽대륙의 다수 나라들에서는 참심제도가 국민의 사법참여를 위한 제도적 장치로 확보되어 운용되고 있습니다. 이들 나라들에서 시민사회의 형성과정과 헌법국가 성립의 상이한 조건들에 따라 각기 다소 다른 양상들을 보이기는 하지만, 공통점은 어떠한 형식으로든 주권자인 국민 내지 일반시민이 사법과정에 참여하는 통로를 열어놓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잘 알고 계시듯이 배심제도는 일반시민들 가운데 무작위로 선정된 비법률가인 배심원들이 시민의 대표 내지 보편성의 대표로서 법적 분쟁의 사실판단을 함으로써 국가의 재판권에 참여하고 직업법관은 이러한 배심원단의 사실판단에 기속되어 양형 등의 법적 판단을 행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참심제도는 배심제도와는 달리 일반시민들 가운데서 선정된 참심원(명예법관)들이 일정한 제한된 임기동안 직업법관과 함께 하나의 합의체 재판부를 구성하여 직업법관과 동등한 지위에서 동등한 권한을 가지고서 재판의 전 과정을 수행하는 제도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국민의 사법참여는 시민의 권리이자 동시에 의무이기도 합니다. 주권자인 국민의 사법참여가 왜 위헌이겠습니까? 그간 국내 헌법학계에서는 현행 헌법 하에서 일반시민이 배심원으로서 법적 판단이 아닌 사실판단만을 담당하는 배심제도의 도입은 허용되지만, 일반시민이 직업법관과 동등하게 사실판단뿐만 아니라 법적 판단까지 행하는 참심제도의 도입은 허용되지 않고 이를 헌법개정사항으로 보는 것이 다수학자들의 견해였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사실은 배심제도를 취하는 미국의 경우에 연방헌법과 수정헌법에 배심제에 관한 명문의 규정을 두고 있는 반면에, 독일의 경우에 치밀한 법이론적 체계를 유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방헌법인 기본법에 아무런 명문의 규정이 없이 단지 법원조직법상의 규정만으로 참심제를 취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결국 배심제가 되었건 참심제가 되었건 간에 주권자인 국민 내지 일반시민이 국가권력인 사법권력의 행사에 참여하는 제도적인 장치가 마련되는 것이 국민주권주의원리에 의해서 정당화되고 또한 요청된다는 사실입니다. 배심제 내지 참심제의 도입과 관련하여 논란되는 쟁점이 우리 헌법 제27조 제1항에서 규정하고 있는 ‘헌법과 법률이 정한 법관에 의한 재판을 받을 권리’와의 저촉여부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헌법 제101조에서 제1항은 “사법권은 법관으로 구성된 법원에 속한다.” 그리고 제3항은 “법관의 자격은 법률로 정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헌법 제103조에서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고 정하고 있습니다. 즉 헌법은 법관의 기능과 관할에 대해서 규정하고 있을 뿐이지 헌법전 어디에도 변호사자격을 가진 법률전문가에게만 법관직을 맡긴다는 명문의 규정이 없습니다. 이는 단지 법원조직법에서 규정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참심제 도입과 관련하여 독일에서의 기본법 해석에서와 같이 헌법규정상의 ‘법관’개념에는 원칙적으로 직업법관과 비직업법관(명예법관) 양자 모두가 포함되고, 제104조 이하 규정에서의 ‘법관’개념에는 협의의 직업법관만 포함되는 것으로 해석할 합헌적 해석의 여지가 충분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즉 헌법개정이 없이도 현행 헌법 하에서 배심제도 내지 참심제도의 도입이 가능하다는 게지요. 어쨌든 제기되는 위헌논란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는 헌법개정을 통해서 국민의 사법참여에 관한 명문의 규정을 헌법전에 삽입하는 것이 가장 타당한 방법이겠지만, 최근에 다시 개헌이 사회 내에서 논란되고 있듯이 그것이 결코 용이한 작업이 아니기에 이를 마냥 미루고만 있는 것도 마땅한 태도는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배심제 내지 참심제 도입에 관해서 제가 앞에서 피력한 현행 헌법 하에서의 합헌적 해석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작년에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가 입안한 ‘국민의 형사재판참여에 관한 법률안’에 따르면 국민참여재판의 적용여부에 관해서 피고인의 의사를 존중하여 피고인의 적극적인 동의가 있는 경우에만 적용토록 하고, 배심원단의 평결에 대해서 법원이 이에 직접적으로 기속되지 않는 권고적 효력만을 부여하는 등으로 현행 헌법 하에서 제도 도입과 관련한 위헌성의 논란을 불식시키기 위해서 세심하게 배려한 여러 노력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선 제도 도입의 필요성이 그만큼 강하다는 것이겠지요. 우리 모두가 진정한 재판관이 될 수 있습니다. 지혜로운 명판결로 인구에 회자되는 솔로몬왕이 직업법관이 아니었듯이 독일의 극작가인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d Brecht)의 희곡 <코커서스의 분필원(Der kaukasische Kreidekr-eis)>에 등장하는 인간적인 재판관인 아츠다크(Azdak) 역시 우리로 치자면 본래 면서기였다가 혁명기에 잠시 인민재판관직을 맡았을 따름입니다. 공교롭게도 두 재판 모두가 아이의 어머니를 확인하는 사건이었고, 전자의 경우가 생모를 찾는 재판이었다면, 후자의 경우는 진정한 어머니를 찾는 재판이었습니다. 또한 헨리 폰다가 주연했었던 ‘12인의 성난 사람들(Twelve Angry Men)'을 보았던 옛 감동이 아직도 가슴 속에 잔잔한 여운으로 남아있습니다. 가끔씩은 수업 중에 학생들에게 이 영화를 권해보기도 합니다. 이처럼 재판이라는 것이 실체적 진실을 발견하기 위한 제도화된 절차에 불과하다면 그간 우리 사회에서 법관직의 전문성이라는 도그마가 얼마나 큰 괴물이 되어있는지요. 주권자인 국민이 사법과정에 참여하는 것이 왜 위헌이겠습니까? 지극히 당연한 일을 두고서 법관직의 전문성과 재판의 독립성을 내세워 명시적인 헌법적 근거 없이 법관직을 마치 성역화해서 국민의 사법참여를 회피해 온 그간의 법제도가 오히려 위헌이지 않겠습니까! 사족이 길어졌습니다. 모쪼록 앞으로도 의원님의 치열한 의정활동을 기대하면서 글을 맺습니다. 두서없는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종수 드림 (연세대 법대 교수·헌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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