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은행도 피해자라 친족상도례 적용못해”
할아버지의 통장에서 돈을 몰래 빼낸 손자는 형사처벌을 받아야 할까? 형법에는 직계 혈족의 물건을 훔쳤을 때 형을 면제해주는 ‘친족상도례’ 조항이 있지만, 계좌에서 돈을 몰래 이체하면 금융기관도 피해자가 되므로 이 면책 조항을 적용할 수 없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 3부(주심 이홍훈 대법관)는 28일 할아버지의 통장에서 자신의 계좌로 몰래 돈을 이체한 혐의(컴퓨터 등 사용 사기) 등으로 구속기소된 정아무개(28)씨에게 “할아버지와 거래하는 은행은 이체된 돈을 이중으로 지급할 위험에 빠진 피해자에 해당하므로 ‘친족상도례’를 적용할 수 없다”며 일부 형의 면제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광주지법으로 돌려보냈다고 밝혔다.
정씨는 2005년 8월 할아버지 이름을 도용해 휴대전화 2대를 개설하고, 통장을 훔친 뒤 현금지급기를 이용해 57만원을 자신의 계좌로 이체했다. 검찰은 휴대전화를 개설한 것에 대해서는 사기 혐의 등을 적용했고, 돈을 이체한 부분은 금융기관을 피해자로 보고 컴퓨터 등 사용 사기 혐의를 적용해 지난해 1월 기소했다. 정씨는 1심에서 혐의가 모두 인정돼 지난해 2월 징역8월의 실형을 선고 받았으나, 광주지법은 지난해 4월 항소심에서 계좌 이체한 혐의에 ‘직계 혈족 등 가족 사이에 벌어진 몇가지 재산범죄에는 형을 면제한다’는 조항(형법 328조 등)을 근거로 형을 면제하고 다른 혐의만 인정해 징역6월을 선고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할아버지의 거래 은행은 할아버지에 대한 예금반환 채무를 부담하면서 정씨의 거래 은행에 이체자금만큼 결제 채무를 추가로 부담해 이중으로 돈을 지급할 위험에 처한다”며 “피해가 최종적으로는 할아버지에게 돌아가지만 금융기관도 피해자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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