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경숙 수사관
필적 필체 위조 밝히는 대검 문서감정실 유경숙 수사관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찍으면 ‘남’이 된다. 사랑의 감정이야 그 진위를 따지기 불가능하지만, 위조 여부를 가리는 문서감정을 통해 사건의 실체를 밝여야 하는 수사관들에게 글자 한 획은 ‘진실의 금문자’다.
지난해 12월 대검찰청 문서감정실에 사건 하나가 접수됐다. “계약서에 쓰인 날짜가 ‘2004년 1월30일’에서 ‘4월30일’로 위조됐는지를 가려달라.” 한마디로 ‘1’에 ‘∠’을 나중에 가필해 ‘4’로 만들었다는 것이 피해 고소인의 주장이었다.
대검찰청 문서감정실 유경숙(46) 수사관은 일단 ‘4’를 쓴 필기구 성분을 조사했다. 나중에 가필했다면 계약서를 쓸 때와는 다른 필기구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광학 감정장비로 글자에 빛을 쏘이면 필기구의 잉크 성분에 따라 빛의 파장이 다르게 나타난다. 결과는 동일한 필기구 사용.
유 수사관은 필적, 필체 감정에 들어갔다. 글자를 쓸 때의 빠르기에 따라 나타나는 글자의 균일성을 따지는 ‘필세’, 자·모음을 쓰는 순서를 따지는 ‘필순’, 초성·중성·종성의 크기, 각도, 간격 등을 비교하는 ‘자획구성’을 일일이 조사했다. 고작 ‘∠’ 한 획에서 이런 특성들을 확인하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다.
유 수사관은 마지막으로 필기구로 종이를 누르는 개인차를 보는 ‘필압’에 승부를 걸어보기로 했다. 해당 글자를 ‘입체(3D)처리’하자 미미한 필압차가 드러났다. ‘ㅣ’을 먼저 쓰고 ‘∠’를 나중에 쓴 사실이 확인됐다. 4자를 쓰는 일반적인 필순과도 달랐다. 같은 계약서에 쓰인 ‘2004년’의 4자는 ‘∠’를 먼저 쓴 사실도 확인됐다. 피의자는 결국 문서 위조를 자백했다.
유 수사관은 3일 발행된 검찰 전자신문 ‘뉴스프로스’에 ‘한 획에 담겨진 진실’이라는 제목의 기고문을 통해, 글자의 무덤에서 진실을 캐내는 문서감정실을 소개했다.
수사경력 18년인 유 수사관은 “문서감정은 글을 쓴 사람의 나이와 건강상태, 필기자세, 필기구와 종이의 종류, 글을 쓸 때의 심리상태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종합적 판단이 필요하다”며 “수십억원의 후원금을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한 황우석 박사도 대검의 필적감정 결과가 증거로 제시된 뒤 차명계좌의 존재 사실을 시인하게 됐다”고 밝혔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정상적으로 쓰인 ‘4’(앞)와 위조된 ‘4’(뒤). ‘∠’와 ‘ㅣ’가 겹치는 부분에서 필순의 선·후가 다르게 나타난다. 뉴스프로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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