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화해위, 유해발굴 중간 발표
당시 총살 현장책임자 고해 증언
당시 총살 현장책임자 고해 증언
“보도연맹원 가운데 에이(A)급은 확실하게 적이라고 생각하지만, 비(B)급과 시(C)급은 농토를 무상으로 나눠준다기에 가입했던 양민들이었습니다. 이분들께 항상 머리 숙여 명복을 빌고 있으며 죄책감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13일 오후 서울 충무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대회의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 강원 횡성과 원주에서 보도연맹원 100여명을 총살한 현장 책임자였던 김만식(81)씨가 입을 열었다. 당시 6사단 헌병대 주임상사였다는 김씨는 “시아이시(CIC·방첩부대)가 처리 지침을 내리면 헌병대가 경찰로부터 보도연맹원들을 인계받아 한 곳으로 끌고가 총살시켰다”며 “여순반란 사건 때만 해도 사형 전날 스님이나 목사님을 불러주고 최후 진술도 들었지만, 보도연맹원들은 눈도 가리지 않은 채 총살시켰다”고 말했다.
최근 4달 동안 △경북 경산 코발트광산 △충북 청원 분터골 △전남 구례 봉성산 △대전 산내 골령골 등지에서 과거 군·경에 집단 학살된 민간인 유해를 발굴해온 진실화해위가 이날 중간 발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날 회견장에는 가해자였던 김씨 뿐 아니라 친척집에 피난갔다가 충북 청원근 분터골 집단학살 장면을 목격했다는 박정길(67)씨도 참석해 증언했다. 박씨는 “7~8일 동안 중적삼을 입은 사람들이 매일처럼 군인들에게 끌려가 총에 맞아 숨졌고, 마을 사람들은 돌아가며 군인들에게 밥을 해줬다”며 “아직도 그때 모습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날 회견에서는 일렬로 앉혀진 채 그대로 묻힌 수십명의 유해, 두손이 묶인 채 두개골에 총을 맞고 쓰러져있는 유해, 숨진 뒤 옮겨져 묻힌 여성의 유해 등을 수습한 사진이 함께 공개됐다. 경산 코발트광산에서 발견된 ‘朴奉羽’(박봉우)라고 새겨진 도장과,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발견된 ‘총무부 남용’까지만 남겨진 찢겨진 명찰 등 유물도 57년만에 세상의 빛을 봤다.
진실화해위 김동춘 상임위원은 “시급히 발굴해야 할 현장 50여곳 가운데 우선적으로 4곳을 조사해 유해 400여구와 유물 1085점을 발굴했다”며 “억울하게 숨진 민간인들의 유해를 방치해온 야만 사회에서 벗어나는 첫발은 뗏지만, 예산 등의 제약 탓에 발굴을 더 확대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고 말했다.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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