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 10년 만에 최고 요리장 꿈꾸는 김영진씨
탈북 10년 만에 최고 요리장 꿈꾸는 김영진씨
‘생선구이와 무숙장아찌’. 지난 10월 한식 조리사 시험 문제를 본 새터민 김영진(24)씨는 빠르게 조기와 무를 다듬어 나갔다. 1시간 안에 두 가지 요리를 완성해야 했다. 조기 아가미를 제거하고 내장을 뽑은 뒤 몸통에 ‘착, 착, 착’ 칼집을 냈다. 손질한 조기엔 양념장을 발라 흐트러지지 않도록 석쇠에 올렸다. 틈틈이 장아찌도 만들었다. 무를 손가락 크기로 자르고 쇠고기와 야채를 볶았다. 무는 간장에 두 차례 졸인 뒤 쇠고기·야채와 한데 모아 다시 졸였다. 시간이 쏜살같이 흘렀다. 요리에 몰두하면서 긴장도 사라졌다. 다만 꿈 같은 지난 10년의 세월이 떠올랐다.
굶주림 피해 함북 떠나 5년간 중국 유랑
남한 정착 6년째 한식 조리사 자격증 따
경기대 외식조리학과 합격 장학금도 받아 1997년, 14살 김영진군은 어머니와 함께 두만강을 건넜다. 살기 위해서였다. 고향인 함경북도에서 굶어죽는 사람이 나오던 때였다. 중국엔 탈북자들이 많아 남쪽에 오기는 쉽지 않았다. 어렵사리 대사관에 들어갔다가 떠밀려난 사람도 있었다. 중국에 머문 5년 동안 어머니가 두 차례, 자신은 한 차례 중국 공안(경찰)에 붙잡혀 북쪽에 송환됐다. 아는 중국인 집을 고리삼아 만나고 헤어지길 거듭했다. 오랜 유랑 생활로 어머니의 허파에 결핵균이 생겨났다. 2001년 가을, 어머니의 결핵이 심해지자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똑같다’는 생각에 몽골로 향했다. 걸어서 국경을 넘고, 대사관을 거쳐 그해 늦가을 한국에 들어왔다. 김씨의 삶은 한국에서도 순탄치 않았다. 북쪽에서 5년 밖에 학교를 다니지 않아, 20살에 초등 6학년 교실에서 수업을 들어야 했다. 떠도는 기질도 남아 ‘학교를 때려치울까’ 고민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바람에 배움의 끈을 놓지 않았고, 2003년 중·고교 과정을 2년씩 4년이면 마칠 수 있는 서울 강서구 성지중·고교에 들어갔다. 이곳에서 그는 지난해부터 요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1년 동안 식당 허드렛일을 하기도 했지만, 처음부터 요리에 뜻을 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5년 넘게 대륙을 떠돌던 김씨에겐 책상에 앉는 것보다 주방에 서는 것이 훨씬 좋았다. 음식을 맛본 친구들의 칭찬도 김씨를 요리에 빠져들게 했다. 끝내 올해 ‘새터민 특별전형’으로 경기대 외식조리학과에 합격해 내년 입학을 눈앞에 두고 있다. 10월엔 두 차례 도전 끝에 한식 조리사 자격증도 따냈다. 학교 교장은 김씨에게 흔쾌히 장학금을 약속했다. 김씨는 앞으로 ‘식객’으로 살고 싶다고 했다. “요리사의 최고인 조리장이 되는 것이 목표”라면서도 “어머니와 함께 시골에 작은 가게 하나 내고 살고 싶다”는 소박한 꿈도 내비쳤다. 늘 요리만 생각한다는 김씨는 식당 국밥을 두고도 “너무 조리료를 많이 쳤다, 나라면 저렇게 안 만들텐데…”라고 말했다. 글 최현준 기자 haojune@hani.co.kr, 사진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남한 정착 6년째 한식 조리사 자격증 따
경기대 외식조리학과 합격 장학금도 받아 1997년, 14살 김영진군은 어머니와 함께 두만강을 건넜다. 살기 위해서였다. 고향인 함경북도에서 굶어죽는 사람이 나오던 때였다. 중국엔 탈북자들이 많아 남쪽에 오기는 쉽지 않았다. 어렵사리 대사관에 들어갔다가 떠밀려난 사람도 있었다. 중국에 머문 5년 동안 어머니가 두 차례, 자신은 한 차례 중국 공안(경찰)에 붙잡혀 북쪽에 송환됐다. 아는 중국인 집을 고리삼아 만나고 헤어지길 거듭했다. 오랜 유랑 생활로 어머니의 허파에 결핵균이 생겨났다. 2001년 가을, 어머니의 결핵이 심해지자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똑같다’는 생각에 몽골로 향했다. 걸어서 국경을 넘고, 대사관을 거쳐 그해 늦가을 한국에 들어왔다. 김씨의 삶은 한국에서도 순탄치 않았다. 북쪽에서 5년 밖에 학교를 다니지 않아, 20살에 초등 6학년 교실에서 수업을 들어야 했다. 떠도는 기질도 남아 ‘학교를 때려치울까’ 고민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바람에 배움의 끈을 놓지 않았고, 2003년 중·고교 과정을 2년씩 4년이면 마칠 수 있는 서울 강서구 성지중·고교에 들어갔다. 이곳에서 그는 지난해부터 요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1년 동안 식당 허드렛일을 하기도 했지만, 처음부터 요리에 뜻을 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5년 넘게 대륙을 떠돌던 김씨에겐 책상에 앉는 것보다 주방에 서는 것이 훨씬 좋았다. 음식을 맛본 친구들의 칭찬도 김씨를 요리에 빠져들게 했다. 끝내 올해 ‘새터민 특별전형’으로 경기대 외식조리학과에 합격해 내년 입학을 눈앞에 두고 있다. 10월엔 두 차례 도전 끝에 한식 조리사 자격증도 따냈다. 학교 교장은 김씨에게 흔쾌히 장학금을 약속했다. 김씨는 앞으로 ‘식객’으로 살고 싶다고 했다. “요리사의 최고인 조리장이 되는 것이 목표”라면서도 “어머니와 함께 시골에 작은 가게 하나 내고 살고 싶다”는 소박한 꿈도 내비쳤다. 늘 요리만 생각한다는 김씨는 식당 국밥을 두고도 “너무 조리료를 많이 쳤다, 나라면 저렇게 안 만들텐데…”라고 말했다. 글 최현준 기자 haojune@hani.co.kr, 사진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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