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종일 작업해도 파도치면 말짱 도루묵”
죽음의 띠는 파도를 타고 밀려와 충남 태안 해안 국립공원을 점령했다. 남쪽 근소만에서 북쪽 원북면 학암포까지 40여㎞에 걸쳐 늘어선 시커먼 기름 덩어리는 이곳 어민과 상인들의 가슴에도 가라앉았다.
넓은 백사장으로 이름난 태안군 소원면 만리포 해수욕장은 폭 50m에 이르는 검은 기름띠가 2.5㎞ 해안을 온통 뒤덮었다. 밀물에 다시 밀려든 원유는 덩어리져 옹벽과 바위 틈에 자리잡았고, 기름띠는 이미 모래사장 밑으로 30㎝ 정도 스며들었다. 만리포 주민들은 9일 아침 7시께부터 바닷가에 나와 군장병 등과 함께 ‘방제작전’을 펼쳤지만, 밀려드는 검은 파도가 야속할 뿐이었다. 방제작업을 하던 국희열(64)씨는 “허리 굽혀 온종일 작업 해봤자 파도가 한 번 몰아치면 말짱 도루묵”이라며 “애초 안이하게 대처해 일이 이 지경이 된 것 아니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모항·천리포·의항 등지의 해변도 기름범벅이 됐다. 기름은 굴·바지락·전복 등 어장과 양식장을 집어삼키고, 해양생태계 깊숙이 스며들고 있다.
천연기념물 431호로 지정된 신두리 해안 사구에도 시커먼 기름 덩어리가 몰려와 뒤덮었다. 지찬혁 태안서산환경운동연합 회원은 “시민단체가 힘을 모아 자연을 복원해 천연기념물로까지 지정된 첫 사례인데 단 한번의 사고로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며 “여수의 시프린스호 사고의 여파가 여전하다고 하는데, 이곳은 언제까지 영향을 미칠지 가늠하기 어렵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신두리에서 1km 가량 떨어진 원북면 의항 포구에서는 주민들에게는 방제작업조차 여의치 않았다. 굴 종묘를 붙여놓은 1m 높이 나무 포자틀에 원유찌꺼기가 들러붙었지만, 인력도 물자도 부족한 탓이다. 주민 문경연(64)씨는 “다들 모래사장에 가 있고 질척한 개펄에는 들어오려고 하지 않는다”며 “굴농사가 겨울에 가장 큰 수입원인데, 다음 학기에 복학하는 막둥이 학비가 걱정”이라고 말했다.
해양수산부는 오염된 개펄은 표면을 모두 긁어내야 할 것으로 보고 있다. 태안군에만 개펄 면적은 100㎢에 이른다. 바위와 자갈에 붙은 기름 제거에도 오랜 시간과 노력이 든다. 이충경(38) 의항어촌계장은 “기름을 걷어내도 2~3년 뒤에는 유화제로 굳혀 놓은 기름 덩어리가 올라올 테고, 정말 답이 안 나온다”고 말했다.
의항 포구에 펼쳐진 개펄에는 숨어있던 고둥들이 깊숙이 스며든 기름독을 이기지 못하고 기어나와 언제일지 모를 마지막을 기다리고 있었다. 만조로 물이 올라온 오후 2시께 겨우 손을 쉬고, 기름냄새 속에서 생라면을 씹는 태안군 어민들의 얼굴에는 고단한 기색이 역력했다. 바다를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은 수평선에 놓인 해상크레인과 괴물 같은 유조선에 가 꽂힌다. 태안/노현웅 기자,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golok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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