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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아이들 마음까지 덮친 기름… “할머니, 죽는다는 말 하지마, 응?”

등록 2007-12-12 13:22

충남 태안군 소원면 의항에서 굴을 까는 일로 생계를 꾸리며 손자 손녀를 키우는 이영월(가운데)씨가 11일 오전 손자 손녀와 함께 시커먼 기름으로 뒤덮인 굴양식장 앞을 지나가고 있다. 태안/김명진 기자 <A href="mailto:littleprince@hani.co.kr">littleprince@hani.co.kr</A>
충남 태안군 소원면 의항에서 굴을 까는 일로 생계를 꾸리며 손자 손녀를 키우는 이영월(가운데)씨가 11일 오전 손자 손녀와 함께 시커먼 기름으로 뒤덮인 굴양식장 앞을 지나가고 있다. 태안/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마을분교 19명중 11명이 ‘조손가정’…생계 캄캄
할머니 할아버지 잡고 울먹…“마음이 아파요”
“할머니, 죽는다는 말 좀 하지 마, 응?”

수영(8·가명)이가 울먹이며 할머니의 팔을 잡아당겼다. 손녀의 원망을 들으면서도 이영월(70)씨는 연신 한숨처럼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바다를 시커멓게 덮어버린 기름유출 사고가 나기 전까지 이씨는 굴을 까며 생계를 꾸렸다. 하루벌이 2만5천원. 7년 전 막내아들 부부가 이혼하면서 서울에서 손자와 손녀를 데리고 고향인 충남 태안군 소원면 의항으로 내려왔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굴을 따고 까서 손자 손녀를 애지중지 길렀다.

하지만 이젠 끝이다. 초등학교 졸업을 앞둔 손자 진수(12·가명)도 시커먼 기름 덩어리가 원망스럽다. “약을 한 움큼씩 드시는 할머니가 우리들 때문에 고생하시는데 ….” 진수는 말끝을 흐렸다. 손자의 말을 듣던 이씨는 “이 몸뚱아리가 돈이지 뭐 …” 하며 애써 손자를 달랬다.

서울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살아가는 아들은 벌이가 시원치 않아 차삯이 없다며 고향에 내려오지도 못하고 있다고 한다. 세 식구가 사는 집의 방은 냉기가 가득하다. 이씨는 “애들 간식비를 모아 간신히 초겨울을 보낼 기름은 사놨지만, 이제 곧 떨어질 것 같다”며 “이웃에서 얻어놓은 전기장판으로 이 겨울을 나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진수의 담임인 이병택 교사는 “진수네 할머니가 조금이라도 소득을 올려보겠다며 비닐하우스를 지어 굴 양식을 준비했지만 지난가을 큰 바람에 날아가 버렸다”며 안타까워했다.

소원면 의항분교에 다니는 19명 가운데 11명이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맡겨져 산다. 양식장을 집어삼킨 시커먼 기름 덩어리들은 아이들의 마음에도 깊은 생채기를 냈다. 소희(12·가명)는 “아침 일찍 방제 작업에 나서는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며 “굴 양식이 잘돼서 굴을 보내 달라는 예약 손님들이 있었는데, 이제 주문이 끊겨버렸다”고 말했다. 소희는 저녁마다 할아버지의 허리를 밟아드렸다고 했다. 소희는 “할아버지가 얘기하시지는 않지만 충격을 받으신 것 같다”고 걱정했다.

그림그리기 시간에 아이들이 그려놓은 바다는 온통 새카맣다. 해영(10·가명)이는 “일주일에 두세 번씩 바다에서 하는 체육 수업을 이제 못할 것 같다”며 시무룩해졌다. 영수(11·가명)의 할머니 이정규(80)씨는 “아들이 꽃게잡이를 해서 손자들을 먹여 살리고 있는데, 기름이 1~2년이 아니라 오래도록 남아 있으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하다”고 말했다. 의항분교 박인숙 교사는 “이번 사고로 생계를 잃게 된 가정이 많다”며 “그렇지 않아도 보살핌이 부족한 아이들이 더 힘들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기름유출 사고는 의항분교 존폐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아이들에게 의항분교는 교육·복지·의료·문화기관이나 다름없다. 박 교사는 “지난해부터 본교와의 통폐합 문제가 불거졌는데, 바다 농사를 포기한 사람들이 늘어가면 의항분교 통폐합 얘기가 또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손녀를 둔 김진곤(65)씨는 “바다에 나가서 일할 동안 아이들이 학교에 가 있어 마음이 놓였다”며 “큰 학교도 좋지만 아이들을 가까이서 돌봐주는 학교가 있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 바다를 휩쓴 기름 덩어리는 바다에 기대 살아가는 이들의 삶까지 송두리째 흔들고 있다.

태안/이정연 기자 xingx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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