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감원 우리은행·신한증권 ‘김용철 계좌’ 조사 결과
금융감독당국이 12일 우리은행과 굿모닝신한증권이 김용철 변호사 명의의 삼성그룹 차명계좌 개설 과정에서 금융실명제법을 위반한 사실을 밝혀냄으로써 금융실명제를 비롯한 금융거래의 기본 원칙들이 거대 재벌 앞에서는 유명무실하다는 것이 새삼 확인됐다.
금융감독원 조사 결과를 보면, 두 금융기관은 본인이 오지 않았는데도 위임장도 없이 계좌를 개설해줬다. 또 자금세탁 혐의가 있는 2천만원 이상 거래에 대해 당국에 보고하도록 돼 있는 ‘혐의거래 보고제’도 어긴 것으로 밝혀졌다. 이런 점들은 거대 재벌 앞에서는 금융기관은 물론이고 금융 관련 법령이 한없이 작아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런 위법 행위를 감시해야 할 금융감독당국의 칼날은 무뎠다. 감독당국이 금융실명제 위반을 밝혀낸 것은 김용철 변호사가 의혹을 제기한 날로부터 무려 45일 만이다. 현장검사만 하면 며칠 만에 밝혀낼 수 있었던 사안이라는 점에서 그동안 감독당국이 보인 행태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경제 질서의 근간인 금융실명제가 무너졌다는 의혹이 제기된 상황에서도 금융당국은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감독당국은 의혹이 제기된 초기엔 “언론 보도만으로 검사를 할 수 없다”고 하더니, 검사 요구 여론이 높아지자 “두 금융기관의 자체 조사가 선행돼야 한다”며 발을 뺐다.
금감원 실무자 사이에선 “현장 검사를 하면 며칠 만에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인데, 눈치보기가 심하다”는 볼멘소리도 터져나왔다. 실제 금융감독당국은 현장 검사 착수 10일(영업일 기준) 만에 금융실명제 위반 사실을 밝혀냈다.
현장 검사도 검사 범위를 네 계좌로 제한하는 등 소극적이었다. 이런 탓인지 조사 결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네 계좌 개설 과정에서의 법 위반 사실만 확인됐을 뿐, 또다른 차명계좌의 존재 여부는 밝혀내지 못했다. 또 두 금융회사가 법 위반을 무릅쓰면서까지 삼성그룹에 차명계좌를 개설해 준 배경과 조직적 공모 여부 등에 대해서도 밝혀내지 못했다. 경제개혁연대는 이날 성명서에서 “(김 변호사의 의해) 증명 자료가 공개된 사안에 대한 단순 확인조차 미룬 당국의 시간끌기에 분노를 느낀다”며 “금융질서 교란 행위에 대해 감독하고 규제할 의지를 갖고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꼬집었다.
감독당국은 조만간 제재심의위원회를 열어 처벌 수위를 결정할 예정이다. 그러나 법을 위반한 주 행위자와 이를 통제하지 못한 감독자, 해당 기관에겐 500만원 이하의 과태료만 부과될 뿐이다. 해당 기관에겐 별도의 기관 경고 조처가 내려질 수도 있다. 금융실명제법 위반을 밝혀내도 현행법상으로는 ‘솜밤망이’ 처벌만 할 수 있는 셈이다. 김경락 기자 sp9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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