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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베트남 종전 30돌 “치유 안된 상처”

등록 2005-04-29 18:33수정 2005-04-29 18:33

돌아오지 않는 해병 제발 생사만이라도…

“내 동생 용선이요?”

흥분해서인지 그의 목소리는 떨렸다. 28일 저녁 충북 청주 한국병원에 입원 중인 이용익(62)씨는 환자복 차림으로 병실에서 내려왔다. 당뇨 합병증으로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그렇지만 “보여줄 게 있다”며 집으로 가자고 재촉했다.

“1972년 11월2일 실종으로 처리된 파월장병 이용선의 형 이용익입니다. 여러 방면으로 수없이 알아봤으나 결국은 실종됐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으니 답답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 지금까지 군으로부터 아무런 통지도 받지 못했습니다. 회신을 부탁드립니다.”

형 용익씨 36년 수소문

“정부·군 책임회피” 분통

그가 내민 것은 동생 이용선씨의 병적증명서와 지난 20일 국방부 장관에게 보낸 편지였다. 1969년 늦가을께 “어머니, 형님! 곧 귀국해 만나뵙겠습니다”란 내용의 편지를 끝으로 동생의 소식이 끊긴 지 36년 만에 동생의 소식을 전해달라고 정부에 요청한 것이다.


세계의 지성들이 ‘더러운 전쟁’이라고 했던 베트남전이 끝난 지 30일로 30년이다. 65년 1월 처음 전투부대를 베트남에 보냈던 한국은 73년 철군할 때까지 연인원 32만명을 파병했다. 국방부는 베트남에서 한국군 5천여명이 숨졌고, 6명이 실종됐다고 밝히고 있다. 이용선씨는 실종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69~82년 외무부와 국방부 등의 기록이 담긴 정부 비공개 문서인 <월남전 포로 및 실종자 송환>(CA0006682)에 나오는 이용선씨의 사진과 자료를 보여주자, 어느새 이용익씨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 베트남전에 참전했다가 69년 실종된 이용선씨의 형 이용익(62)씨가 28일 충북 청주시 사직동 자신의 집에서 동생의 병적증명서를 보여주고 있다. \

“어머니께서는 꿈에서 봤다면서 오늘은 올 것이라고 대문 밖에 나가 동생을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곧 돌아오겠다던 제 동생을 애타게 기다리다 73년 7월 돌아가셨죠.” 어머니는 작은아들의 생사는 물론,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한 채 숨을 거뒀다.

동생은 베트남에서 한 달에 한두차례 꼬박꼬박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몇 해째 소식이 끊기자 이용익씨도 여기저기 수소문했으나 허사였다. 그는 “서슬퍼런 군사정권 때라 군이나 정부기관에 항의할 수도 없어 안 오면 안 오는 대로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아니면 실종됐는지, 군이나 정부에서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동생의 유품 하나 오지 않았다.

3년 전에야 비로소 이씨는 동생이 실종됐다는 것을 처음으로 확인했다. 그는 “당뇨로 몇 해 전부터 병원에 자주 입원했는데, 병실에서 참전 군인들을 만나 동생 얘기를 꺼내자 ‘왜 가만 있느냐, 해군본부에 가면 사유라도 들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해 찾아가게 됐다”고 말했다. 나이가 들고, 몸도 좋지 않아 동생의 생사 확인을 서둘러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충남 계룡대의 해군본부와 병무청에서 동생의 실종을 확인한 순간에도 울분을 삼켜야 했다. 그는 “해군본부에서는 동생이 행방불명돼 아무것도 모른다는 답변만 들었다”며 “나라에서 내 동생을 전쟁터에 보내놓고도 어떻게 이렇게 답변할 수 있느냐고 따졌다”고 말했다.

이씨는 28일 기자가 보여준 자료를 통해, 동생 이용선씨가 어디서 어떻게 실종됐는지도 처음 들었다고 했다. 베트남전 당시 청룡부대 본부중대 수송반(보안대 파견)에 있었던 병장 이용선(당시 23살)씨는 69년 11월2일 “(베트남 중부의 최대도시) 다낭으로 귀국 준비차 외출 중 행방불명”이라고 기록돼 있다. 베트남전 때 한국군은 일반적으로 1년 동안 복무하고 귀국했다. 68년 11월 베트남에 간 이용선씨는 귀국을 며칠 앞두고 실종된 것이다. 군에서는 실종 3년이 지난 72년 11월2일 최종적으로 그를 행방불명으로 처리했다.

이용익씨는 “정부나 군에서 내 동생이 실종된 상황을 속 시원하게 설명해 주고, 남의 자식을 데려가고도 책임지지 못해 미안하다고 하면 안 되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지금도 동생이 숨졌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눈으로 직접 보기 전까지는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차라리 전사했다면 체념이라도 하고 살텐데 ….” 이씨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청주/글·사진 황상철 기자 roseb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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