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적·의학적으로 인정돼”
박아무개(당시 9살)양은 2000년 5월 눈앞에서 동생(당시 8살)이 차에 치이는 장면을 목격했다. 초보 운전자가 길가 담을 따라 걷던 동생을 들이받은 것이다. 박양의 동생은 골절 등의 중상을 입었다. 박양은 차에 치이지는 않았지만 정신적 문제를 보이기 시작했다. 말수가 적어지더니 수면장애가 왔다. 대인기피증까지 나타나기 시작했고 학업성적도 크게 떨어졌다. 이런 증세는 사고를 당한 동생에게도 나타났다.
박양의 부모는 보험사에 직접 차에 치인 동생뿐만 아니라 박양에 대해서도 보험금을 지급하라고 요구했다. 보험사는 박양의 정신질환과 사고를 목격한 것과의 인과관계를 선뜻 인정하지 않고 소송을 냈다.
1심 재판부는 박양 자매 모두의 ‘외상후 스트레스장애’를 인정해 박양에게 2800만원, 동생에게 3400여만원의 치료비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그러나 항소심은 “생명에 위협을 줄 정도의 대형 사고가 아니었고 직접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 아니라는 점 등을 봤을 때, 교통사고와 박양의 정신장애 사이에 인과관계가 없다”며 박양에게는 위자료만을 지급하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대법원 2부(주심 양승태 대법관)는 “만 9살에 불과한 박양이 사고로 인해 상당한 정신적 충격을 받았을 것임을 경험칙상 인정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직접 외상을 입지 않았지만 가족의 생명을 위협하는 사건을 목격함으로써 받게 된 고통과 정신적 충격이 외상후 스트레스장애의 발병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의학적으로도 인정된다”며 원심을 깨고 사건을 대구고법으로 돌려보냈다고 21일 밝혔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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